나의 글 98

수필 / 넝쿨장미 한 그루(1982)

넝쿨장미 한 그루 “아이구 야야, 자꾸 씻거 샀는다꼬 본대 생기 묵은 살이 보해지나(하얗게 되나)?” 얼굴에 닿는 비누 거품에 연신 재채기를 하시며 내가 잡고 있는 손에서 자꾸만 벗어나려고 하신다. “문지(먼지) 지도 살까이, 흙에 구불고 사는 놈이 그까짓 문지 겁내서 우째 사노?” 올해 일흔 여섯이 되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씻으시는 걸 아주 싫어하신다. 월중 행사로 아버지 머리 깎아드리고 목욕시켜 드리는 날이 되면 이웃이 다 알 정도로 야단법석을 떨어야만 된다. 처음엔 그저 물만 적시고선 도망가시더니 그래도 이젠 비누 거품에 약간은 면역이 되신 모양이다. 가만히 앉아서 해주는 밥 드시기도 힘들다 하실 연세이신데 발에 흙 떨어질 날 없이 일하시고, 마음 놓고 담배 한 대 피우실 시간 없이 언제나 바쁘신 ..

나의 글 2011.07.28

수필 / 그리움은 냄새로 남는다

그리움은 냄새로 남는다 향기는 존재를 나타내고 냄새는 생존을 나타낸다고 했던가. 향기는 모두에게 달콤하게 지나가지만 냄새는 추억을 간직한 사람에게만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고 하는데 그대가 떠나고 없는 어느 날 불쑥 못 견디게 그대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가 좋아하던 음식이나 음악이 있을 때는 당연하겠지만 때로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문득 밀물처럼 가슴으로 밀려드는 그리움이 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머리를 감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김칫국을 끓이다가…… 눈발이 날리는 차가운 겨울 저녁 김칫국 냄새는 그의 냄새로 다가온다. 묵은 김치의 시큼한 냄새와 푹 삭은 양념의 맛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냄새로 오감을 자극한다. 요즘 아이들은 김치를 잘 먹지도 않거니와 김칫국은 더더욱 즐기지 않..

나의 글 2011.07.10

수필 / 버스가 떠났다

버스가 떠났다 버스가 떠났다. 한동안 멍하니 버스 꽁무니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2, 3분 정도, 그래, 내 생애에서 이렇게 2, 3분 정도만이라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방금 보낸 아들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15년이 넘은 그때 보낸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잘 있느냐? 잘 있어라.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2, 3분의 이 시간- 해병대에 입대한 아들이 6주간의 힘든 훈련을 끝내고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 동대구역에서 이동을 한다고 했다. 그를 꼭 빼닮은 멋진 아들이 어느새 장성해서 군대에 간 것이다. 입대하는 날 아침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기껏 아들이 좋아하는 깻잎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염려와 당부의 말을 되풀이하면 오히려 잔소리로 들릴 것이고 서로가 눈물을 보이지 ..

나의 글 2011.07.10

수필 / 봄비

봄 비 발바닥이 간지럽다. 씨앗들이 기지개를 켜며 뾰족이 고개를 내민다. 겨우내 움츠렸던 다리 쭈욱 펴고 발바닥 까치발하고 머리 살짝 내밀며 봄비 맞는다. ‘봄비’하고 말하면 입술이 간지럽다. 간지러운 입술에 침을 바르고 엿듣듯이 가만히 귀 기울이면 새싹들의 간지러운 웃음소리 들린다. 실개천의 버들개지 보드라운 솜털이 귓속을 간질인다. 봄비는 그렇게 우리들 가장 예민한 촉수를 살짝 애무하며 다가온다. 봄비는 실로폰의 ‘라’음으로 내려온다. 약간 반올림 된 실로폰의 맑은 음이 들린다. 노란 비옷을 입고 일기예보를 하는 아나운서의 퐁퐁 튀는 음성처럼 봄비는 물오른 가지에, 메마른 대지에 퐁퐁 튀는 악보 하나 던져준다. 봄비는 천천히 촘촘히 날실로 내린다. 사르륵사르륵 명주실 잣는 소리로 내린다. 한참을 바라..

나의 글 2011.07.01

수필 / 가을, 목에 걸리다

가을, 목에 걸리다 가을이다. 문득 올려다본 파아란 하늘에 비행기 한 대가 하이얀 줄을 그으며 평화로이 날고 있다. 의무처럼 무릎을 깨고 다니던 서너 살 이후 그 어린 시절부터 저 비행기를 보며 먼 곳에 대한 동경과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그리움을 간직하기 시작한 것 같다. 동무들과 놀다가 모두 돌아가고 혼자 남은 해질녘,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바라보던 슬프도록 곱고 막막하던 하늘, 스산하던 자줏빛 수숫대의 울음소리, 엄마 치맛자락 꼭 잡고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오후 네 시쯤의 산그늘 한 자락. 그 때부터 늘 가슴 한 켠에서 화두처럼 떠나지 않는 그리움이 있었다. ‘그리움’ 이라는 단어만 되뇌어도 목이 메는 이 그리움- 메밀꽃 스쳐온 바람이 조금씩 도토리 냄새를 풍기..

나의 글 2011.07.01

독서감상문 /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를 읽고

우리 마음 속의 꿈을 찾아서 - 파울로 코엘료의‘연금술사’를 읽고 - 파울로 코엘료의 란 책이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른 지가 오래되었지만 읽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란 제목이 단지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방법이 아닌 어떤 인생의 철학적 계시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펼쳤다. 프롤로그를 펼치니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 나르키소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호수가 한 말이 압권이었다. ‘이제 나르키소스의 눈에 비치던 자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어서 너무나 슬프다’고-. 철학서에 대한 선입견과 긴장감을 풀고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 라는 청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에 사는 한 작은 마을의 평범한 양치기였다. 정확히 ..

나의 글 2011.07.01

수필 / 여름비

여름비 우르릉 쾅! 뜨거운 햇빛 한 자락 싹둑 잘린다. 유월 하늘에 짙은 수묵화 한 점 빠르게 번지는가 싶더니 뒷산 밤나무 끝에 큰 획으로 바람 한 줄 걸어 놓는다. 연초록 밤나무 잎이 일시에 간지러운 웃음으로 자지러지고 밤꽃 향기 발꿈치 들고 사랑채 문턱을 넘어 들어온다. 사랑방에서 올려다 본 수묵화 한 점 순식간에 마당에 떨어지고 장독 위를 후두둑 몰아치던 중모리 장단의 빗소리가 갑자기 스레트 지붕 양철 처마에서 자진모리로 빨라진다. 장독대 단지 뚜껑 제일 먼저 제자리에 가 얹히고 빈 독에 꽂혀 있던 마른 싸리꽃잎 이제사 봄 이야기 끝낸다. 바지랑대 넘어지며 빨랫줄이 숨 가쁘고 텃밭 옥수수 잎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지 못하고 어지럼증으로 한참 동안 멀미를 한다. 앞마당에 석류 꽃잎은 눈물샘이 있다더니..

나의 글 2011.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