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목에 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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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문득 올려다본 파아란 하늘에 비행기 한 대가 하이얀 줄을 그으며 평화로이 날고 있다. 의무처럼 무릎을 깨고 다니던 서너 살 이후 그 어린 시절부터 저 비행기를 보며 먼 곳에 대한 동경과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그리움을 간직하기 시작한 것 같다.
동무들과 놀다가 모두 돌아가고 혼자 남은 해질녘,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바라보던 슬프도록 곱고 막막하던 하늘, 스산하던 자줏빛 수숫대의 울음소리, 엄마 치맛자락 꼭 잡고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오후 네 시쯤의 산그늘 한 자락. 그 때부터 늘 가슴 한 켠에서 화두처럼 떠나지 않는 그리움이 있었다. ‘그리움’ 이라는 단어만 되뇌어도 목이 메는 이 그리움-
메밀꽃 스쳐온 바람이 조금씩 도토리 냄새를 풍기는 이맘때쯤 초등학교 운동장의 허름한 천막과 낡은 만국기, 여 선생님의 목청 높인 구령 소리, 코스모스 꽃길, 새 운동화 신고 그야말로 머리가 하늘까지 닿도록 뛰어다니던 그 학교 길, 이제 기억의 창고에서 흑백사진으로 남은 한 장의 풍경화가 되었다.
고향 집 마당가의 커다란 감나무, 석류나무, 풀밭 같은 꽃밭에서 생색을 내던 빛바랜 맨드라미 몇 그루와 제멋대로 자란 자줏빛의 휘들어진 국화, 집 뒤 언덕에 꿈처럼 피어있던 연보랏빛 쑥부쟁이,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 없이 거기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詩가 되어서 가슴 적셔주던 것들이었다. 오늘 도시의 한복판에서 그 쑥부쟁이꽃을 가슴 가득히 들여놓는다.
가을 햇살 한 자락을 받으며 툇마루에서 빨간 고추를 다듬고 계시던 어머니의 하얗게 퇴색해버린 머리카락, 콩밭에서 콩 줄기처럼 바짝 마른 모습으로 콩을 뽑으시던 아버지의 여윈 어깨, 바로 몇 년 전 고향 집에 가면 만날 수 있던 갈색 빛깔의 가슴 아린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 가을, 갖가지 나물들을 봉지봉지 담아 주시던 그 어머니는, 장작불 지펴 가마솥에 고구마와 땅콩 삶아 놓고 기다려 주시던 그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 울컥 또 그리움 한 조각이 목에 걸린다. 정말, 그리운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해질녘 산그늘이 마당을 덮을 때쯤 으스름 하늘에 번지던 하얀 연기, 구수한 소죽 끓던 냄새가 그립다. 이제 다시 갈 수 없게 된 빈 고향 집, 잡초가 무성하게 뒤덮인 마당 한 켠에 어머니가 아끼던 큰 장독이며 단지들, 부지깽이와 몽당빗자루, 비뚜름한 흙 부뚜막에 놓여 있던 가마솥, 꿰매놓은 바가지며 칠 벗겨진 찬장, 손때 묻은 세간들과 받아 놓은 씨앗들, 몇십 년 아니 한 세기를 아버지 어깨에 매달려 지냈을 지게며 농기구, 손수 삼으신 짚신, 주인을 잃은 그것들은 이제 서정이 아닌 서사로 남아 있다.
그것들이 소중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 하나 가져오지 않았다. 좁은 아파트에 들여놓을 것들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리움의 무게가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보내버리고 싶었다. 그 정겨운 것들은 이제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자취도 없이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어느 날 꿈결에서, 잊고 있었던 우리 집 소 풍경소리 선명하게 들었던 것처럼, 귀뚜라미 우는 어느 가을 새벽 한 번쯤은 이 풍경들 다시 볼 수 있을까?
바람이 인다. 가을바람이다. 살아있음의 흔적 같은-. 대학엘 가지 못하고 방황하던 스무 살 그 시절 어쩌다 발 닿았던 낯선 도시 맹아학교의 그 가을이, 빈 그네 터 위에 내려앉던 이십여 년 전 그 은행잎이 바하의 선율되어 노랗게 내 불혹의 나이를 흔들어 댄다. 보이지 않는 축구공을 힘껏 찼지만 발이 닿지 않았을 때의 형용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 허망함, 목마름, 그런 것들, 그러나 그들은 태연히 축구공을 찼고 나는 그들 앞에 부끄러웠다. 그 가을 새로운 유서를 갈아 끼우게 해준 그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그리움은,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더 짙은 그리움을 몰고 온다. 가을 산이 좋아 가을 산속으로 가 버린 사람, 가을 산속으로 출장을 떠난 사람, 아직도 그 사람은 출장 중이다. 헤아려 보니 십 년이 훨씬 넘어 버렸다. 아니 아직 십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하이얀 국화꽃을 들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가다가 길가에 꽃다발을 내동댕이치고 길 위에서 길을 잃던 날들…… 그래도 지구는 돌고 가을은 이렇게 돌아오고 국화꽃은 어김없이 피어나고 있다. 이제 그 사람이 한 송이 국화꽃 되어 해마다 나를 찾아온다.
노을빛이 너무나 아름답다. 가슴에 밀물처럼 차오르는 그리움- 이제 조금씩 가라앉히며 한 마흔네 번쯤 노을빛이나 바라봐야겠다. 그리움이란, 이렇듯 다시 돌릴 수 없는 애틋한 세월로 인해 한층 더 절절하게 가슴속에 맺히는가 보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리운 것들, 기약할 수 없는 세월 속의 그리움을 붙잡고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것들을 목 놓아 불러 본다. 끝. (불혹에서, 원고지 14매)
<지금은 헐어 버린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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