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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여름비

몽당연필^^ 2011. 6. 23. 22:57

                        여름비                            

 

 

 

우르릉 쾅! 뜨거운 햇빛 한 자락 싹둑 잘린다.

유월 하늘에 짙은 수묵화 한 점 빠르게 번지는가 싶더니 뒷산 밤나무 끝에 큰 획으로 바람 한 줄 걸어 놓는다. 연초록 밤나무 잎이 일시에 간지러운 웃음으로 자지러지고 밤꽃 향기 발꿈치 들고 사랑채 문턱을 넘어 들어온다. 사랑방에서 올려다 본 수묵화 한 점 순식간에 마당에 떨어지고 장독 위를 후두둑 몰아치던 중모리 장단의 빗소리가 갑자기 스레트 지붕 양철 처마에서 자진모리로 빨라진다.

 

장독대 단지 뚜껑 제일 먼저 제자리에 가 얹히고 빈 독에 꽂혀 있던 마른 싸리꽃잎 이제사 봄 이야기 끝낸다. 바지랑대 넘어지며 빨랫줄이 숨 가쁘고 텃밭 옥수수 잎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지 못하고 어지럼증으로 한참 동안 멀미를 한다. 앞마당에 석류 꽃잎은 눈물샘이 있다더니 유월 땡볕에 달아오른 사랑을 전하지 못한 채 안으로만 삭이며 순식간에 붉은 눈물, 나무 밑을 물들인다. 낮잠 자던 누렁이 깜짝 놀라 온몸을 털고 잠시 살아있는 것들은 일시 정지, 세찬 빗소리 웅장하게 여름을 연주한다.

 

베잠방이 흠뻑 젖은 아버지는 풀이 반쯤 찬 낡은 지게 밑에서 숨이 가쁘고 등이 흠뻑 젖은 어미 소는 그래도 느릿느릿 늙은 주인의 걸음에 발을 맞춘다. 저만치 따라 오던 송아지 딴전 피우며 남의 밭에 콩잎 한번 뜯고 관심 한번 끌고 여름비는 빠른 난타로 송아지 엉덩이에 경고장을 때린다. 외양간에 젖은 소 몰아넣고 오랜만에 쇠죽솥에 불을 지핀다. 여름비 오는 눅눅한 오후 보릿짚 타는 냄새는 낮게 깔리는 몽글몽글한 연기를 타고 구수한 밀사리 냄새로 온 동네를 덮는다. 가마솥 뚜껑 위에 말려 둔 옷가지들 스르르 낮 꿈에 젖는데 여름비는 저 혼자 중중모리 자진모리 나무들 흔들어 깨운다.

 

바깥마당 돌배나무의 돌배는 익어도 별맛이야 없지만 그래도 안간힘을 다해 매달려 있는데 휘청거리는 가지가 위태롭다. 풀밭 같은 꽃밭의 맨드라미 가을까지 견디리라 입술 깨물며 혼자서 의연하고, 멀리 동구 밖 내다보며 짝사랑을 곁눈질하던 해바라기 후들거리는 다리가 불안하다. 울 밑에 선 봉숭아꽃잎 어느 손톱 끝 첫사랑을 꿈꾸는데, 여름비 한 줄기 물관마저 훤히 보이는 봉숭아 뿌리 뒤흔들며 기다림을 마구 흔들어댄다.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연약한 것들,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뽑아버릴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다시 그리움을 키울 튼실한 받침대 하나 받쳐준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여름비 한 자락은 앞산 쑥국새 울음 가슴으로 불러들이고 오뉴월 뙤약볕에 시들해졌던 그리움의 촉수 하나 건드린다. 감꽃 목걸이 새들하게 말려서 그리움 하나씩 따서 먹던 배고픈 이야기, 떨어진 런닝구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어머니의 쪼그라진 젖가슴, 참 오랜만에 만져보는 말랑말랑한 손끝의 행복이다. 마당물이 한줄기 빠져나가고 뜨거웠던 대지가 시원해지면 여름비는 비로소 마음을 적셔주는 맑은 플루트의 소리로 내린다. 잠시 눈을 감고 달콤한 오수 속에 빠질 때 파리 한 마리 낮 꿈 위에 앉는다.

 

황토흙 잔뜩 묻은 유월콩 한 바소쿠리 뽑아 뜨락에 늘어놓고 식구들 둘러앉아 콩을 까면 우리들 가난한 일상도 그렇게 껍질을 벗는다. 눅눅한 마루엔 싹이 난 유월콩, 이룰 수 없는 알록달록한 꿈들을 마루 위에 눕힌다. 햇볕에 잘 마른 것들은 보석처럼 영롱하기도 하지만 뿌리내리지 못할 싹을 틔운 콩들은 비만 오면 마루나 안방을 차지해서 귀찮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예쁜 색깔만큼 맛이 따라주지 않는 유월콩은 부푼 밀가루 빵 위에서 그래도 생색을 내보지만 여름비 속의 유월콩은 내 유년의 이루지 못한 꿈으로 뒹군다.

 

여름비 쏟아지는 오후엔 적당히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집집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 그려진다. 모락모락 김 오르는 감자를 주먹으로 툭 치면 확 부서지는 포말 같은 속살, 그 뜨거운 감자를 입 안에 넣으면 사르르 밀려드는 졸음 같은 행복, 감자 먹는 사람들은 몇 개의 감자 앞에서 행복을 배운다. 노릇노릇 눌어붙은 솥 밑바닥을 놋숟가락으로 긁어대는 어머니의 거친 손은 우리들 입에 알뜰하게도 사랑을 퍼 담는다.

 

캄캄해진 하늘에 천둥이 치고 세차게 여름비 한바탕 퍼붓고 나면 뜨거웠던 우리들 마음으로 확 트인 강물 하나 흐른다. 앞개울에 황톳물이 불어나고 다리 밑으로 자잘한 윗마을 이야기들이 떠내려가면 어느새 시침 뚝 딴 말갛고 따가운 여름 햇살, 매미 소리 시끄럽게 자지러진다. 귀먹은 할매들은 서로 소통되지 않는 아들 자랑, 딸 자랑을 매미 소리보다 더 크게 해 댄다. 다리 위 오동나무 그늘은 다리 밑으로 떠내려간 이야기만큼의 오순도순 또 하나의 작은 이야기들을 만든다.

 

텃밭에 나간 어머니는 부러진 고추나무를 손질하고 쓰러진 깻단을 바로 세운다. 소나기에 얼굴 씻은 인물 좋은 토란잎, 소나기에 도리어 황토 흙을 묻힌 호박잎, 그 크고 넓은 그리움 안고 우엉잎, 양댓잎, 들깻잎들과 내일 아침 장으로 시집갈 단장을 한다. 갈라진 틈새마다 풀물 묻은 어머니의 두툼한 손은 넉넉한 두께로 정확하게 이것들을 묶어낸다. 어느 아주먼네의 소박한 저녁 밥상 위에서, 행복의 포만감을 가져다 줄 한 소쿠리의 푸르른 희망을 엮는다.

 

장에서 돌아오는 늙으신 어머니는 구겨진 지전 몇 장, 간 고등어 한 손에 식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아픈 다리를 잊을 것이다. . (200자 원고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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