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시간 보내기 / 화첩기행 다시보기

몽당연필^^ 2018. 5. 27. 21:53

 

시간 보내기 / 화첩기행 다시보기

 

 

오랜만에 꼬박 열 세 시간 한 가지 일에 몰두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책을 보다가 어두워서 시계를 보니 저녁 일곱 시다. 오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책 다섯 권을 수박 겉핥기 식이지만 계속 읽고 있었다. 제목은 <화첩기행>, 화가 김병종 교수의 그림보다도 글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었다. 화첩기행 시리즈(5)를 꼭 사봐야지. 거기 나오는 그 지역들을 꼭 여행해 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다.

 

한 달 전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한 달 전에 나도 오백만 원 정도의 도서실 책을 구입해야 했다. 읽고 싶은 책, 권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로 내게 말해달라고 했다. 지금은 인문학을 권장하는 추세라 근무하는 직장에서 퇴임하는 사람들에게 읽고 싶은 책을 선물로 사준다는데 그 선물이 고맙게도 내게로까지 전달 되었다.

 

약간은 의무적인 것이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도 책을 사서 읽은 적이 오래전이고 꼭 읽고 싶은 책도 생각나지 않았다. 학교도서관에 추천되는 도서목록을 보면 흥미 위주이고 지금 시대상,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 대부분이다. 편견 없이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비판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된다. 소설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언제부터인가 허구적인 것에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 전부터 사야지 했던 책이 있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그렇게 말해놓고 생각해보니 너무 오래 전 책이다. 절판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쏟아지는데, 서점마다 베스트셀러 책들이 쏟아지는데 도서실에 있으면서 읽어봐야지 하는 책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니 얼마나 부끄럽고 오만한 일인가.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사 그 책 다섯 권을 한꺼번에 펼쳐놓고 읽은, 아니 본 것이다.

 

책을 사 준 조건으로 독서 감상문을 권당 이백 자씩 적어내야 한단다. 당연히 내가 읽었으니 내가 적어야 하는 게 맞다. 오월 안에 적어야 하는데... 일단, 젊은 시절에 난 미술이나 화가들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90년대에 신문에 연재했던 화첩기행, 김병종 교수도 올해 정년퇴임이라고 한다.

 

1권 14쪽 <밤의 고향 (불꺼진 군산항)>

 

 

화첩기행 1, 2권은 4년 전인가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몇 년 안에 꼭 이 여행지를 가봐야지 했었다. 첫 번째 여행지가 전북 군산이다. -채만식과 군산- ‘밤의 선창에 비가 뿌린다. 정박한 배의 희미한 불빛에 빗줄기가 사선으로 비친다. ’군산항과 탁류- 문학과 미술을 접목한 이런 형태의 글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군산엘 가봐야지 늘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도 꿈처럼 느껴지는 군산항... 내게 그런 날이 있었던가? 이리시 마동 전북맹아학교... , 갑자기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거의 일 년, 20대 그때 나는 잠깐 거기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니 도피하고 있었다. 군산항, 그랬구나! 그때 그곳 어느 군부대에 친구와 함께 면회를 갔었구나.

 

무진- 상상의 도시라 해도 꼭 있을 것 같다. 순천만 어디쯤에...  김병종 작가도 내 스무 살을 지켜준 문화에 김승옥과 김민기가 있었다고 했는데 내 스무살 시절에도 무진기행을 읽으며 작가에 대한 환상을, 무진기행에 대한 환상을, 무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무진기행이 소설임에도 기행인 것처럼 얼마나 두근거리며 그 대목을 읽었던가.

 

2권을 읽으면서 매창에 대해 우리가 모르고 있던 조선시대 예술가들의 생애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아련한 아픔이 묻어왔다. 그런데 3권을 읽으면서 감정이 달라졌다. 그 당시엔 이런 감정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나의 생각과 작가의 생각에 많은 괴리가 생겼다. 전혜린, 이미륵, 윤이상, 이응노... 예술은 역시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 발자국을 남기나 보다. 체제에 순응 한다던가 평범한 삶은, 평탄한 사람은 예술가로 남지 못하는가?

 

3권까지는 다시 보기를 했지만 4, 5권은 읽어보지 않은 내용이다. 라틴 아메리카- 영혼의 땅, 색채의 교사란 그의 서문만으로도 무한한 동경과 설렘이 작동한다. -풍경들은 하얗게 바스러져가는 시간 속으로 멀어진다. 불타는 석양의 가을 강과 선홍빛 와인 잔 너머로 날리는 눈발, 애잔한 색소폰 소리, 보랏빛으로 이동하는 이역의 구름, 햇빛에 반짝이는 카리브, 끝 간데 없는 연둣빛 풀밭, 조용히 흔들리는 숲, 오래된 바닷가의 오래된 찻집-

 

멕시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30대 한 때 열정과 분노로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한 인물이었던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글을 써서 학점을 잘 받은 적도 있지 않았던가? 산다는 건 어차피 무언가를 견뎌내는 것이라고... 그런데, 이 책이 화첩기행인데 내 생각이 자꾸 편협해진다.

 

4권에서는 혁명이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혁명가가 미화된다. 항상 가고 싶어 했던 곳, 너무나 멀고 너무나 다른 생활 속의 작가와 화가들, 그래서 동경했고 존경했고 그들의 삶이 부럽기까지 했었다. 쿠바, 체 게바라, 카리브해, 아바나, 칠레, 산티아고, 영혼의 집... 이것들은 지금 나와 너무나 멀리 있다. 시대적 상황인가? 나는 대충 책을 넘기고 말았다.

 

4권153쪽 <고요아칸 프리다 칼로의 기념관>

 

5 - 북아프리카 사막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별빛 (알제리, 이집트, 튀니지, 모로코) 목차를 훑어봤지만 귀에 익은 단어가 별로 없다. 그만큼 나의 시야가 좁은 것이다. 알제리, 알베르 까뮈, 장 그리니에, 그래도 가슴이 조금은 뛴다.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튀니지? 튀니지였던가? 사하라 사막의 그 모래바람... 캐서린과 알마시의 위험한 사랑...  97년이었구나. 그 때 본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함께 보기로 했었지만 같은 시간에 각자 보았던 그 영화, 어딘가 감상문을 적어 놓았건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작가가 4년에 걸쳐 연재 한 것을 열 세 시간 만에 훑어보았다. 당연히 차근차근 다시 읽을 것이라고 말을 해둔다. 기억은 언제나 추억의 어떤 장면과 함께 한다. 장면이 있던 장소, 그곳을 찾아가보는 것이 여행이다. 예술가들이 살던 장소,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 화첩기행은 그런 곳에 대한 설렘과 동경을 가져다 준다. 그 곳에 나도 장면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아는 만큼 보인다고 작가의 재능과 화가의 재능을 함께 지닌 김병종 교수는 얼마나 많은 장소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새삼 부럽다. (잠시 책에 너무 빠져있었다. 작년에 고인이 된 그의 부인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이 좁은 사각의 공간에서 한 발짝도 탈피하지 못하고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흐린 하루가 지나고 어둠이 몰려온다. 이제 불을 켜야지.

 

 

5권  196쪽 <튀니지 기행>

 

 

 

 

 

'나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편지 / 받는즉시 답장 주세요.^^  (0) 2019.04.29
지금 난 뭘하고 있지?  (0) 2018.10.20
전화위복(轉禍爲福)  (0) 2018.04.08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0) 2016.02.29
때론 명절증후군도 그리워진다.  (0) 2016.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