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림리 사람들
삼천 개 이상의 메일이 쌓여있는데 읽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그냥 둡니다. 거의 다 필요 없는 메일인데 보지 않고 지우기가 미안합니다. 나중에 한번 읽고 지우리라 생각하면서... 카페 메일은 더욱 더 그러 합니다. 그 중에 눈에 띠는 이름 하나, 권O옥... 반가운 마음이었지만 워낙 바쁜 주간이어서 금방 답장을 쓸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마음 가다듬고 그리움에 잠겨 봅니다.
佳林(가림)리- 아름다운 수풀의 동네였던가? 이름만큼 아름답지는 않은 고향 부모님이 안 계시니 가지 않게 되고 반가워할 사람도 없다보니 멀어지게 되고 그러나 늘 가슴 한 구석 아련한 그리움이 걸리는 곳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던 거랑 위 다리 걸에는 언제나 동네 할매들이 모여앉아 길목을 막고 있었습니다. 머슴애들이 우리 집엔 얼씬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길이 아니면 올 수가 없었기에 원천 봉쇄였던 것이지요. 지금은 복개가 되어 길이 넓어졌고 옛 집과 다리도 없어졌습니다.
다리 저쪽과 다리 이쪽 마주 보면 보이는 집, 양달과 음달, 우리 집은 해가 빨리 지는 음달 뜸이었지요. 동네 들어가면 다리 오른쪽 편 이쪽에 영숙이 이모, 아니 이태 이모가 살았습니다. 다리 왼쪽 건너 엔 우리 집이 있었습니다. 이태 이모 집에는 단짝 친구 이태가 있었지요.바쁘게 메일을 읽어 내려가다가 ‘이태’라는 대목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딱 걸렸습니다.아주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10년이 되었나? 20년이 되었나? 20년이 넘었나? 어쩜 이렇게도 무정하게 생각 없이 지냈을까요?
이태 큰이모가 혼자 살았기에 이태는 부모님을 두고 큰이모 집에 살게 되었는데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 길렀었지요. 한 동네 살았지만 이태와 나는 한 반이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등수가 나란히 되면 같은 반이 될 수 없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지요. 이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좋은 옷, 이쁜 옷을 입고 다녀 우리의 부러움을 샀던 친구, 촌 애 같지 않던 말쑥한 이태였습니다. 키가 크고 몸이 약했지만 악대부장을 했고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께 돌아가서 대구의 명문여고를 졸업했고 임상병리학을 전공해서 병원에 근무하다가 결혼을 했고 아들을 출산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끝나야 되는데 어느 날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친구 이태, 고향 친구들이 병원을 다녀왔는데 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마지막 그 모습을 내 기억 속에 남겨두기 싫었습니다. 너무 말라 있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참 이기적인 생각으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친구를 병문안 간다는 것이 부질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가족들 보기가 죄스러웠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를 떠나보낸 내가 죄인인 것 같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지막 줄 ‘ㅇ용’이라는 이름 앞에서 그만 가슴이 싸아했습니다. 그랬었지. 아들 ㅇ용이가 있었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모른 척하고 살았습니다. 슬픈 이야기들은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빨리 잊으려고 애썼는지도 모릅니다. 어쩜 고향과 관계되는 많은 일들을 일부러 기억의 창고에서 지우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garim이라는 메일주소를 보고 나를 확인했다고 했지요.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내 고향 佳林, 아름다운 기억이 훨씬 많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이종사촌인 이태 언니를 닮은 늘씬한 키에 얼굴이 하얀 부잣집 읍내 소녀, 가끔씩 이모 집에 오면 촌녀인 우리들은 부러워 했었습니다. 산으로 들로 다니진 않았지만 함께 했던 적은 있었지요. 그 앳된 소녀가 벌써 시어머니가 되었다니... 이태 이모도 이태도 안동댁도 안동어른도 그리고, 그리고...... 그. 이. 름...... 이제 그들을 내 고향 가림리에서는 영원히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이란 단어는 그립고도 아립니다. 세상은 좁습니다. '가림'이라는 단어의 공통분모로 오늘 내 어릴 적 친구 이태의 사촌 동생에게 편지를 씁니다. ㅇ옥이라는 이름을 통해 가림리를 추억해 봅니다. 거의 30여 년을 살았던 내 고향 가림리...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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