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기억 속의 들꽃 / 머슴 양선태

몽당연필^^ 2015. 6. 14. 11:08

 

기억 속의 들꽃/ 머슴 양선태

 

        

 

 

시간이 많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 맞다. 정말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오월, 행사가 많다. 내리 나흘을 놀고 있자니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들꽃처럼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얼굴이 하얗고 서울말을 쓰는 소년이었다. 소년이라고 하기엔 낭만이 전혀 묻어있지 않은 기억이다. 총각도 남학생도 오빠도 어울리지 않는 잠시동안 우리 집 머슴으로 머물렀던 얼굴, 약간 사각형에 가까운 둥글 넙적한 선한 인상의 그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했고 부모가 없다고 했다. 이리저리 떠돌다 어찌 우리 촌 동네까지 밀려오게 되었을까? 내가 4, 5학년 때쯤이었고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았다고 한 것 같다. 이름은 양선태아직도 이름이 기억나다니...

 

어릴 때는 우리 집이 부잣집인 줄 알았다. 쌀밥을 먹을 수 있었고 계란 프라이를 밥 위에 덮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고 운동화를 신었고 달린 양말(팬티스타킹)을 신고 다녔다. 그러나 그건 막내인 나에게만 베푼 특혜였다. 우리 집은 조그마한 과수원이 있었지만 논 예닐곱 마지기의 겨우 밥 먹고 살만한 그런 집에 불과했다. 그 당시 시골이라도 잘 사는 집은 머슴 몇 명과 식모를 두고 살았었다. 우리 집은 농사는 많지 않았는데 얼마간 머슴이 있었다. 부모님이 연세가 많았고 아들이 없어서 힘든 농사일을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머슴을 두지 않았을까 싶다. 이현우, 양선태, 난식이 오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머슴의 이름이다. 오월,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는데 느닷없이 그들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45,6년 전 그때만 해도 밥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고 잠잘 곳이 없어서 하룻밤 잠을 재워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집이 들목길이어서인지 외지에서 장사꾼이나 낯선 사람들이 오면 우리 집으로 보냈다. 식구들 자는 방에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들을 하룻밤 재워주고 아침밥까지 먹여서 보내는 일이 많았다. 가끔 물건을 하나씩 주는 사람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공짜였다. 때론 행색이 초라한 거렁뱅이들도 잠을 재워서 보냈다. 선태도 마찬가지 경로로 우리 집에 왔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보낸 것이다. 아들을 삼으라고 보냈는지 머슴을 삼으라고 보냈는지 우리 집에 와서는 사정을 이야기했고 한 달만이라도 좀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며칠을 재워주고 농사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은 할 수 있어도 농사일은 해보지 않아서 못한다고 했다. 식모살이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집에서는 식모를 들일 정도의 일도 돈도 없었다. 우리 집에는 농사일을 도울 사람이 필요하니 다른 집에 알아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한 열흘 정도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학교에 갔다 오니 그가 없었다. 말을 붙여 보지도 못했고 부모님께 우리 집에 있게 하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이튿날, 친구들이 학교 가는 길 다른 동네에서 그를 보았다고 했다. 아직 기거할 곳을 정하지 못한 채 길거리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밥도 먹지 못하고 잘 곳도 없이 떠돌아다닌 그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암담했을까?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열 몇 살, 그 이후 다른 동네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 지금 살아있다면 60대 중반, 후반이 되었을까? 학교도 가지 못하고 남의 집 머슴이나 식모살이를 했을 것이다. 못 배운 것이 한으로 남은 어느 아버지가 되어 있을까? 자수성가한 어느 공장 사장님이 되어 있을까? ‘머슴 대길이처럼 부잣집 아들의 마음속 시로 남아 있을까? , 그때 늦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배고프고 잘 곳 없어서 혹시 얼어 죽지는 않았을까?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이 바로 가장 힘든 세상을 살아온 지금의 6,70대 아버지다. 지금쯤 머리 희끗한 노년기에 접어들어 자식들 출가시키고 열 몇 살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까? 추운 겨울 이 집 저 집 쫓겨 다니던, 기억도 하기 싫은 그 시절을 어쩜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기억 저 편, 아무런 사건 없는 장면 하나가 오월의 바람처럼 들꽃처럼 스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