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낮꿈 / 도라지꽃 누님, 도라지꽃 친구

몽당연필^^ 2013. 8. 11. 20:07

 

 

오늘은 어제보다 바람이 일어서 한결 더위가 덜 했다.

그동안 여름이라는 특성 때문에 조금은 들떠서 지낸것 같기도 하다.

차분해지면 그리움이 도질까봐 일부러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는지도 모른다.

어제 돌아다녔더니 피곤해서 아침 늦게까지 게으름을 부리며 누워서 빈둥대다가

책꽂이에 꽂힌 책에 눈이 갔다. 재작년에 산 것 같은데 아직 펼쳐보지 않은 책이

몇 권 있었다. 그 중에 한 권이 구효서의 ‘도라지꽃 누님’이었다.

구효서 특유의 문체가 좋아서 샀는데 제목이 너무 삼류 소설 같은 느낌이라서 안 읽었나?

하여튼 읽지 않고 방치해 두었는데 오늘 문득 ‘도라지꽃’이란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냥 누운 채로 책을 넘겨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구효서 특유의

평범하고 단순한듯 하면서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펼치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장편이 아니라 11편의 단편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다.

 

도라지는 사실 화초가 아니다. 아마 도라지꽃만을 보기 위해 심는 경우는 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랏빛 도라지꽃은 약재나 식용으로 쓸 수 있는 도라지와는 별개로 내 맘 속에 각인 되어 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설악산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가면서 보았던, 강원도 어디쯤인가

산자락에 끝없이 펼쳐지던 그 보랏빛과 흰빛의 도라지꽃이 늘 수채화처럼 내 가슴에 들어와 있다.

방학이 끝나갈 때쯤 고향집 과수원 구석에 꿈처럼 그리움처럼 하늘대던 그 보랏빛 도라지꽃,

보통 시골 화단에 섞여있던 빨갛고 노란 색이 아닌 보랏빛이 한층 신비로움을 더해 줘서

도라지꽃을 보면 꿈을 꾸고 있는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한 때 ‘보라돌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보라색에 심취하기도 했었다.

우아함이라고도 하고, 신비함이라고도 하고, 외로움이라고도 하고,

환자들이 좋아하는 색이라고도 하고...

아무튼 보랏빛 도라지꽃은 늘 유년의 꿈으로, 아련한 그리움으로 아른댄다.

 

           

 

 

도대체 그 누님이 어떠했길래 ‘도라지꽃 누님’이라 했을까?

-어느 날 생전 처음으로 회식이란 걸 하고 남편과 시어머니가 무서워서

세발 자전거를 타는 아이를 두고 집을 나왔고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누님은 혼자 살면서 점점 맹렬해져 갔다.

얼마큼 돈을 번 누님은 산골 산전리에 집을 얻어 죽을둥살둥

집 꾸미는 일에 매달리며 서울과 산전리를 오갔다.

누님은 농사짓는 일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조경회사에서 비싼 돈을 주고 꽃나무를 심고

일주일이 멀다하고 인사동을 드나들며 집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친구나 친지를 불러 파티를 열고 집을 비우고 하느라 백구나 먹구에게 신경 쓰지 않아

어느 날 백구(개)가 누님을 물었고 백구는 음식을 거부한 채 죽게 되었다.

그 이후 누님은 집 주변에 온통 도라지꽃을 심었다.

콩이나 옥수수 따윈 심어보지 않던 손으로 수천 포기의 도라지꽃을 심었던 것이다.

난 이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애. 하니까 되더라구. 재미도 있구...

 

뭐 이런 내용인데 이 책의 내용이야 뻔한 이야기다.

아니 이 책 아니라도 소설이란게 우리들의 있음직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니까 뻔하긴 하다.

나는 사실 스토리보다는 구성이나 문장, 문체를 많이 보는 편이다.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잘못 번역된 책들을 읽으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아무튼 조금 읽고 말아야지 했는데 머리 쓰지 않아도 되니까 거의 다 읽게 되었다.

누워서 책을 읽다가 책을 얼굴에 덮고 낮잠을 잔 지가 참 오래 되었다.

‘도라지꽃 누님’이란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이 더운 여름 한 낮 장편의 낮꿈을 꾸었다.

우리 집 과수원에 하늘대던 도라지꽃이 한창일 때, 아마 이맘때 쯤이었나 보다.

동네친구들은 소 먹이러 모두 가고 오후 네 시 낮잠에서 깨어나면 아무도 없고

땀에 젖은 얼굴에 파리똥이 묻어 있곤 했었다. 여름 뙤약볕 아래의 그 정적이라니...

방학동안 우리 집에 와 있던 조카들도 가고 방학숙제는 안했는데 개학은 다가오고...

지금도 오후 네 시는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듯한 허망함과 쓸쓸함이 묻어온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이 가라앉은 것 같은,

두레박에 실려 깊은 우물속으로 내려앉는 것 같은 적막감과 쓸쓸함이

나를 휘감아서 여간해서 낮잠을 잘 자지 않는다. 

 

 

 

낮꿈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혼한 이후 몇 번 만나다가 소식이 끊긴 친구가 꿈속에 나타났다.

지금 알아보려고 하면 알아볼 수도 있지만 거의 20년 소식이 끊긴 친구가

보랏빛 도라지꽃과 함께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체구가 크고 성격이 활달해서 ‘헐크’라고 불렸는데

그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잘 생기고 멋지고 여성스럽기까지 한 남자와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고 간간히 좋지 않은 소문이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오기도 했다.

그 즈음 내게 전화가 왔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아주 아리따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걸 목격했다고 했다. 시어머니마저 그걸 인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죽어도 이혼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화가 한 시간씩 두 시간씩 늘어나게 되었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10시 반이면 잠을 자야 한다. 밤에 전화가 오면 귀찮고 무섭기까지 했다.

남편이나 시어머니에 대한 살기를 그대로 내게 들어내기도 하자 나마저도 생활이 편안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투쟁이란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평화로운 것을 추구한다.

 

전화를 하지 마라고 했다.

늘 바쁘고 밤에 일찍 자야 되니 전화 받기가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 이후 전화가 뜸했고 지금까지 연락이 끊어진 상태다.

진정한 친구란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해결해 주지 못해도 들어주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정신과 의사는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이야기 듣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매일 똑 같은 주제, 똑 같은 이야기를

몇 시간씩 혼자서 이야기 하는 친구에게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렇게 친구에게 바로 이야기를 해 버린 것이다. 내 아픔이 더 컸던 그 시기였다.

나는 누구에게 내 이야기를 한 시간 이상 했던 적이 있었나? 단연코 없다.

지금도 할 말을 다 하는 것 같지만 내 속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 이후 친구의 이야기를 여기서 다 할 수는 없다. 간간히 소문은 듣고 있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낮꿈에서 그 친구를 만난 거다. 어릴 때 항상 같이 놀았고 힘이 세서 우리를 보호해 주던 친구였다.

재미있는 사건이 너무나 많아서 만나면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친구다.

 

 

 

결혼을 잘 했다고, 잘 생긴 남편을 만났다고 동네가 떠들썩했었다.

그렇게 결혼을 잘 하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왜 우리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일까?

그 친구는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도라지꽃 누님’ 을 읽으며 이 친구를 꿈속에서 만나다니...

그리움도 달아 날 이 더운 여름 한낮, 이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은 낮꿈 뒤의 허망함...

어린 시절 마냥 즐겁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보랏빛 낮꿈에 젖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