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라디오
몇 시간째 라디오를 찾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형 카세트이다. 빨간색 마이마이 카세트겸 라디오를 찾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장 앞에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어디로 갔을까? 며칠 전부터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계속 이리저리 뭔가를 찾고 있었는데 혹시 이 라디오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추억 속의 사람? 추억 속의 물건?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은 이 허전함... 아침부터 어수선하게 집안을 뒤지고 뒤져도 없다. 마음에 거미줄이 쳐진 것처럼 복잡하고 답답하다.
나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쉽게 버리지를 못한다. 첫돌 때 입었던 저고리부터 초등학교 때 쓰던 노트까지 아주 소소한 것이어도 정이 든 것이면 모아 둔다. 그런데 내가 아주 아끼던 마이마이 카세트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뒤숭숭하다. 그것도 복숭아 봉지를 싸서 처음으로 번 돈으로 구입한, 내 스무 살 시절의 소중한 친구다. 함민복 시인의 ‘추억 속의 라디오’란 수필이 교재에 실려 있다. 난 이 분보다 훨씬 더 많은 추억을 라디오와 함께하면서 산 것 같다. 그래서 오랫동안 간직해 온 내 손때가 묻은 추억 속의 라디오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온다고 대청소를 한 적이 있지만 그것을 버렸을 리는 없는데 정말 울고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엘 가지 못한 나는 라디오가 친구이자 애인이고 스승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학교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좁은 사각의 공간에서 더 넓은 세상의 일들을 들을 수 있었고 감동 받을 수 있었으며 스무 살 감성을 자극하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 FM방송을 들었고 음악 신청을 하고 엽서를 보내고 기다리며 라디오와 함께 생활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음악은 대부분 그때 들은 것이다. 라디오를 통해서 누구인지 모르는 친구에게 서로 음악도 보내고 편지도 하고 그랬었다. 잘 된 엽서로 채택되면 방송국에서 엽서 전시회도 열고 연극 티켓도 보내주고 하였다. 우리 또래의 사람이라면 멜쉬쉐리가 울려퍼지던 ‘별이 빛나는 밤에’ 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당시 ‘이수만과 함께’라는 인기 프로가 있었다. 거기에 나의 글이 채택되어 선물을 받았고 라디오를 통해 내 이름이 알려졌다. 방송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상당수의 편지가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편지 쓰기’만이 외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에 매 일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는 것이 그 당시 즐거운 낙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과 만났던 기억- 아, 잊고 있었던 기억이다. 추억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어설픈 만남-
내가 쓴 글의 제목이 ‘여름 아이’였다. 그래서 '여름 아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난 블로거의 자질이 있었나보다.ㅋ 낙동강 철교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처음으로 낯선 남자를 만났었다. 키 크고 편지 잘 쓰는 사람- 나의 이상향이 거기 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새카맣고 쪼매난 촌 가시내의 모습, 아마 그 사람도 그 기억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블로그를 하면서 스무 살 그때 일이 떠오른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추억은 이보다 훨씬 앞선 초,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는 라디오 연속방송극 ‘왕비열전’의 애청자였다. 동네 친구들은 저녁 8시쯤이면 조선왕조 오백 년 ‘왕비열전’을 들으려고 우리 집에 모이곤 했다. 어쩜 ‘왕비열전’보다 아버지의 해설과 해학이 더 재미있어서 우리 집에 모였는지도 모른다. 아홉 시 저녁 뉴스가 끝나면 아버지의 하루 일과도 끝이 났지만 가끔 늦게 끝나는 ‘전설 따라 삼천리’도 우리들의 재미있는 이야기 친구였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연세가 아주 많으셨는데도 우리들과 친구가 되어 주셨다. 지금도 우리 친구들은 그때 일을 추억하곤 한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나 보다. 겨울과 달리 시골의 여름밤은 모기와 더위 때문에 일찍 잠들 수 없다. 아이나 어른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천둑으로 나가 멱을 감고 모깃불을 피우고 함께 지내다가 열기가 식어지면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든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것 보다 우리 집 마당 살평상 위에 누워 홑이불을 덮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라디오를 듣는 것이 너무 좋았다. 친구들이 불러도 잘 나가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음악방송을 잘 듣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집에 오려면 집 앞에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그 다리엔 늘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어느 날 혼자서 라디오를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라디오 볼륨이 엄청 커져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것이 몇 번 되풀이 되었다. 키득키득 거리며 후다닥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도망가고 있었다. 남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나를 놀려주려고 동네 짓궂은 머슴애들이 장난을 친 것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중에는 나를 좋아하던 남학생이 있었다는 사실- 집 앞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면 산길을 돌아와야 하는데...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동네 구성원이 거의 친척들이었고 모두 순수하던 시절이었다.
매체의 발달로 인해 쌍방향의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 하나면 지구 어디에 있는 사람과도 소통이 가능한 시대다. 소통이란 매체의 발달과 상관없는 것 같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흔하면 귀한 줄을 모른다. 라디오 한 대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말하는 사람의 반언어적 표현까지 온전히 읽어내던 그 시절- 지금도 물론 라디오가 있긴 하지만 보지 않으면 집중을 하지 못하는 세대, 반에서 라디오를 듣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니 단 한 명도 없다. 나도 물론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 라디오는 추억 속의 물건이 되어 버렸다.
늘 내 곁에서 친구가 되어주던 빨간 마이마이 카세트 내 스무살 시절을 함께 한 소중한 물건, 곁에 있을 땐 쓸모없다고 모르고 지내다가 이렇게 보이지 않자 헤어진 사랑을 찾듯이 애타게 찾는다. 35년 전 나를 찾는다.
끝. (200자 원고지 18매)
*혼자서 궁시렁거리며 몇시 간을 찾아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현상금 10만원을 걸자 두 녀석 벌떡 일어나 베란다 창고 안에서
이 카세트 라디오를 찾아 준다. 전략이었다나...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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