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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평설 /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몽당연필^^ 2013. 1. 3. 17:28

 

가이드 북 | 세계 명작을 찾아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권장 수업 시간 : 2교시(100분)

대상 꼭지 : 고교독서평설 2006년 3월호 「세계 명작을 찾아서」

참고 자료 : 이규식 지음, 『빅토르 위고 - 시대의 우렁찬 메아리』(건국 대학교 출판부)

               대니얼 리비에르 지음, 『프랑스의 역사』(까치)

학습 목표 : ① 『레 미제라블』에 담겨 있는 작가의 주제 의식과 비판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 보자.

               ② 『레 미제라블』에 묘사된 내용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토대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이해해 보자.

집필자 : 하남석_ 논·구술 전문 유레카 학원 강사

 

들어가는 글

 

“궁핍은 영혼과 정신을 낳고, 불행은 위대한 인물을 낳는다.”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태양왕’이라 불리는 영웅이 둘 있으니, 그 한 사람은 ‘정치계의 태양왕’으로 군림한 절대 군주 루이 14세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문학계의 태양왕’으로 통하는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다.

“이탈리아에 단테가 있다면, 영국에는 셰익스피어, 독일에는 괴테가 있다. 그러나 우리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가 있노라.”라고 회고한 문필가 앙드레 지드(A. Gide, 1869~1951)의 말처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민 작가로는 단연 위고가 첫손에 꼽힌다.

위고는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을 이끈 소설가·극작가·시인으로서뿐 아니라, 국회의원과 아카데미 회원, 상원 의원을 두루 지낸 정치가이자 화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내가 죽거든 걸인들을 시켜 내 관을 들게 하라.”라고 유언했을 정도로 민중을 진정으로 아꼈고, 휴머니즘을 최고의 가치라 여긴 그의 신념과 인간적 품성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정치 활동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민중에 대한 애착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 바로 『레 미제라블』이다. 이 소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인 1820년대, 곧 19세기 초반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해부와 진지한 고찰이 돋보인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특정 인물이라기보다는 ‘19세기 프랑스 역사와 사회 그 자체’라 해도 조금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심화 자료

 

빅토르 위고의 생애

 

2002년은 빅토르 위고가 탄생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당시 프랑스의 언론 매체는 앞 다투어 그와 그의 문학을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그리고 교육부에서는 아예 각급 학교 수업의 첫 시간을 위고의 작품을 중심으로 진행하라는 지침까지 내려보냈다고 한다.

이런 떠들썩한 행사의 뒷면에는 위고라는 인물에 대한 프랑스 인들의 남다른 자부심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위고는 시·소설·연극 등 장르 전반에 걸쳐 낭만주의 문학을 정착시키고 부흥시킨 불멸의 작가다. 게다가 이미 150여 년 전에 빈곤 퇴치를 교육의 제1 덕목으로 내세웠고, 사형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으며, 유럽 통합과 단일 통화를 예언했다.

그렇다면 이렇듯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국민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위고는 과연 어떤 인물인지, 그의 삶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위고는 1802년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 주(州)의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 위고는 나폴레옹 시대에 전쟁에서 무훈(武勳)을 세워 장군이 되었다. 권위적이고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아들이 장차 장군이 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위고는 아버지의 의견과는 달리 일찍부터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위고는 15세 되던 해인 1817년, ‘연구의 행복’을 노래한 시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상을 받았다. 또 툴루즈 백일장에서 「베르덩의 동정녀들과 앙리 4세 동상」이라는 시로 입상하는 등, 사춘기 소년 시절에 이미 문학적인 재능을 드러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그는 아버지가 바라던 파리의 이공계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불같은 노여움을 뒤로하고서 두 형 아벨과 으젠느의 도움을 받아, 17세 때인 1819년 〈콩세르바퇴르 리테레르〉라는 평론지를 창간했다.

하지만 원래 사이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던 부모가 별거에 들어감에 따라 가세가 크게 기울어, 집안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친구로 지내던 아델 푸세와 사귀게 되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생계가 불안정한 시인인 그와의 교제를 반대하였다.

그 당시 위고는 난방조차 하기 힘든 지붕 밑의 초라한 셋방에서 근근이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의 체험은 뒷날 그의 문학에서 소중한 자산(資産)이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결코 ‘문학’을 향한 꿈과 열정만은 버리지 않았던 그는 1822년에 마침내 첫 시집 『오드(Ode) 기타』를 발표했다. 이 시집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인 문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몇 년 동안 위고는 다양한 형식의 시와 소설을 발표했으며, 뒤마(A. Dumas, 1802~1870), 발자크(H. de Balzac, 1799~1850) 등 청년 작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 결과 보수적인 고전주의자들에 맞서서 낭만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된다. 그는 낭만주의 문인들의 실질적인 지주였으며, 1830년의 7월 혁명❶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혁명의 결과, 황제였던 샤를 10세는 망명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간 황제의 명으로 상연이 금지되었던 위고의 희곡 『마리옹 드 로름』은 열광적인 열기 속에서 공연될 수 있었다. 그는 같은 해에 희곡 『에르나니』의 공연을 계기로 고전주의자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위고는 그 뒤로도 1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시와 희곡을 썼다. 특히 1831년에 발표한 『파리의 노트르담』은 『레 미제라블』과 함께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에는 노트르담 성당을 중심으로 한 15세기 파리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다양한 계급, 다양한 성격의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데, 위고는 생생한 대화와 인물 묘사를 통해 박진감 넘치는 사건 전개를 보여 준다. 영화와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널리 사랑받은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는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무렵이 바로 위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고, 발표한 작품들마다 호평을 받았으며, 사랑하는 부인 아델과의 사이에서는 귀여운 2남 2녀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33년 친구 생트뵈브가 아델과 스캔들을 일으키는 바람에 크게 상심한 그는 여배우 J. 들루에와 연애를 시작했다.

부인과의 사이는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1843년 사랑하던 딸 레오폴딘이 센 강 하류에서 남편과 함께 익사하였다. 애지중지하며 기른 딸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아버지의 절망과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서, 그 뒤로 그는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정치계에 뛰어들었다.

위고는 민중의 뜻을 대변하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참된 사명이라 여겼다. 1845년 프랑스 국회의 상원 의원이 된 그는 1848년 2월 혁명이 끝난 뒤에는 파리 출신 제헌 의원, 입법 의회 의원으로 활약했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의 편에 서서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었으며, 공화제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1851년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시키

고 헌법의 효력을 강제로 정지시키면서 공화파 의원들을 체포하는 바람에, 위고는 기약 없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에서 보낸 19년의 망명 생활 동안 그는 숱한 작품을 남겼는데, 세계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레 미제라블』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5부로 이루어진 『레 미제라블』은 혁명의 시대를 배경으로 타락하고 서로 증오하는 인간 군상을 그려, 그 당시 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타락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그들에게 애정을 기울이는 길밖에 없다는 작가의 따스한 인간애가 작품 전체에 짙게 깔려 있다.

그 뒤 위고는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여 정치적 자유가 회복되고 나서야 비로소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1885년 5월 22일,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영구차에 실려 무덤으로 가기를 원한다. 교회의 그 어떤 추도식도 거부할 것이고, 만인을 위한 기도를 원하며, 신을 믿는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유언과는 달리, 파리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그를 칭송하고 예찬하는 가운데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판테온까지의 운구 행렬에는 그가 남긴 작품들의 제목이 적힌 만장(挽章,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글. 장례식 때 비단·종이로 만든 깃발에 적어, 상여 뒤를 따르게 함)이 나부꼈고, 애도의 물결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인간의 불행을 없애고, 빈곤을 추방하며, 무지를 교육하기 위해 『레 미제라블』을 썼다.”라고 한 위고의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온갖 시련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보였던 장 발장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던 청년 마리우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의 무한한 진보와 이상 사회 건설을 낙관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두 가지 해석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와 유럽 사회의 기본적인 사회 질서와 가치관 그리고 사상적 이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 당시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표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주주의 체제의 근본 이념으로 지켜지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프랑스 혁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면서, 수정주의 학자들은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해석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정통주의 학자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 온 사회의 구조적 결함을 들어, 혁명의 필연성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수정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해석은 단기적으로 시기를 나누어 연구하였으며, 정치적인 원인과 우연한 사건들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점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근거로 혁명의 필연성을 부정하면서 혁명의 무용성(無用性)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면 혁명에 관한 이 두 가지 해석은 어떤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정통주의 해석에 따르면,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한 프랑스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그 결과 계급 간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국가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봉건적 구제도를 뒤집어엎으려 했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혁명이자 반봉건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혁명의 영향으로 중앙과 지방의 정부 체제가 혁신되었고, 공공 교육과 사회 보장 제도가 성립되었으며, 국민 개병제가 실시되는 등 새로운 시민 질서가 성립되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혁명은 봉건적 제도를 전부 백지화시켰고, 농민들을 영주와 교회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그리고 국내 시장을 통합하여 경제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등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결과 근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민중에 의해 역사가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 주어, 뒤이어 일어난 사회적 혁명들의 모범적인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견해에 반발하여,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 사회에 맞서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 독재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적인 요구가 정치적으로 폭발한 것’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전쟁, 애국심, 정치 엘리트들의 행동 등 의외의 변수들이 혁명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또 혁명의 주도 세력은 부르주아 계급이나 엘리트들이 아니라 폭도들로, 그들은 혁명의 이념에 대해서는 모른 채 일부 급진적인 선동가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테러라는 물리적 힘을 제공했을 따름이라고 보았다.

수정주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계몽사상과 국민 주권주의 등 어떠한 이념도 혁명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은 왕실 재정 문제로 왕의 권한이 약해진 가운데 사회적인 문제가 노출되어 일어난 것으로,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들은 프랑스 혁명이 우연히 일어난 정치적 사건으로서, 그 당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 못했고, 오히려 퇴보시켰다는 해석까지 내놓았다. 이러한 견해는 인구 비례로 볼 때,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으며, 사회의 근대화를 앞당겼다기보다는 군국주의적 체제를 만들어 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혁명의 이념은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이었으나, 그 결과가 빚어진 현실은 너무나 비극적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렇듯 프랑스 혁명을 바라보는 상반되는 두 시각은 역사학계에서뿐 아니라, 사실성과 허구성을 함께 지닌 문학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그 예로,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다. 이에 비해 혁명의 비극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영국의 대문호 디킨스(C. Dickens, 1812~1870)의 『두 도시 이야기』(1859)를 들 수 있다.

『두 도시 이야기』는 디킨스가 영국의 비평가·역사가인 칼라일(T. Carlyle, 1795~1881)의 『프랑스 혁명』(1837)을 읽고 감명을 받아, 프랑스 혁명기의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쓴 역사 소설이다. 한 프랑스 귀족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 죄로 18년간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있던 의사 마네트는 석방된 뒤 런던으로 건너간다. 그의 딸 루시를 사랑하는 대니는 그 프랑스 귀족의 조카로, 위선적인 프랑스의 귀족 제도 자체를 혐오해서 영국으로 건너와 영국식 가명을 쓰며 살아간다.

그런데 대니와 마찬가지로 루시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던 또 다른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주정뱅이 변호사 카튼이다. 하지만 카튼은 연적(戀敵)인 대니가 혁명 정부에 의해 처형당하게 되자, 그를 대신하여 죽는다. 루시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대니임을 알고,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디킨스는 여기서 특별히 명확한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관에 입각하여 혁명을 묘사하지는 않았다. 빈민에 대한 작가의 동정심과 개혁주의 사상, 폭력 유혈 사태에 대한 비판이 돋보인다. 특히 격동기 역사를 배경으로, 파리의 긴박한 상황과 런던의 정경을 절묘한 플롯 속에 탁월하게 묘사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들에게 이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도록 지도한다면, 프랑스 혁명과 그것을 전후한 프랑스 사회를 보는 두 가지 견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 활동

 

터 잡기

 

1. 이 작품의 제목인 ‘레 미제라블’은 무슨 뜻인가?

→ 프랑스 어 형용사 misérable에 복수를 뜻하는 정관사 les가 붙어서 명사화된 말로, ‘비참한 사람들’, ‘가엾은 사람들’,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장 발장, 팡틴, 코제트로 대표되는 가난한 사람들, 테나르디에 부부와 자베르처럼 돈이나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을 한데 아우르는 말로서, 19세기 프랑스 민중을 상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길잡이_ 학생들이 등장인물 분석을 통해, 작품의 제목이 무엇을 뜻하고,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는지 이해하도록 지도한다.

【215쪽 참조】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은 프랑스 어로 ‘비참하고 가엾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하층민들의 밑바닥 인생을 다룬 이 작품에서 위고는 한 인간의 사소한 죄가 어떻게 영웅적인 인내로 보상되는가를 말하면서, 사회의 비인간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작품 서문에 나오는 다음 말이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대변해 준다.

“사회에는 법률과 풍습으로 말미암은 처벌이 존재하고, 그것이 문명 속에 인위적으로 지옥을 만들어 내어 신성한 운명을 인간의 불행으로 뒤엉키게 하는 한, 그리고 이 시대의 세 가지 문제, 프롤레타리아의 탓으로 남자가 낙오되고, 굶주림으로 여자가 타락하며, 어둠 때문에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또 어떤 지역에 사회의 질식 상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한, 다시 말해 더 넓게 보아서 이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 한 이러한 책들이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2. 『레 미제라블』에서 시대적 배경을 실감 나게 전달해 주는 대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자.

→ 여행증, 워털루 전쟁, 나폴레옹, 7월 혁명, 루이 필리프, 바리케이드, 시가전, 수도원, 파리의 하수도 등

 

+길잡이_ 학생들이 작품에 나오는 사건과 시대상 묘사 등을 통해 작품 내용을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214쪽 참조】 이러한 위고의 사상과 신념이 그대로 담겨 있는 작품이 바로 『레 미제라블』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그 당시 프랑스의 정치 체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1789년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혁명의 불길은 세기가 바뀌어도 사그라질 줄 몰랐고, 그 속에서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하층민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다. 생산 수단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은 대외적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거기에다 권력자들은 무자비한 폭정으로 국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사회에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다. 결국 굶주림과 폭정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은 다시 혁명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1830년의 7월 혁명이다.

 

○ 『레 미제라블』 평설에서 발췌한 지문들이다. 알맞은 단어로 괄호 안을 채우시오.(3~6)

 

3. 1822년 시집 『오드(Ode) 기타』 발표를 계기로 루이 18세(Louis XVIII, 1755~1824)와 가까워져 연금(年)을 지급받았는데, 이 무렵 위고는 왕당파로서 가톨릭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 밖에 『동방 시집』(1829),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1823), 희곡 『크롬웰』(1827)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 이 시기 문학인들은 위고를 중심으로 ‘세나클(클럽)’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실상 (   ①  )들의 지도자로 통했고, 『크롬웰』 서문은 ‘(  ②  ) 문학의 선언’이라 불렸다. 여기서 그는 ‘하나의 사건이, 24시간 안에, 한 장소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   ③   ) 연극 이론인 ‘(  ④  )의 법칙’ 가운데 시간과 장소의 일치는 지나친 구속이라고 주장하면서 (   ③  )를 맹렬히 비판했다.

(213쪽 참조) ① 낭만주의자   ② 낭만주의   ③ 고전주의   ④ 삼일치

 

4. 역사의 격동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위고가 일생 동안 굳건하게 지킨 신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   ①  )이다. 그는 문학 작품에 (   ①   )을/를 담기 위해 노력했고, 필요하다면 정치 일선에 나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치적 자유와 사회 정의의 실현, 이것은 그가 (   ①   )에 입각하여 옹호하던 것들이었다.

(214쪽 참조) ① 휴머니즘                                        

 

5. 이러한 위고의 사상과 신념이 그대로 담겨 있는 작품이 바로 『레 미제라블』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그 당시 프랑스의 정치 체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1789년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혁명의 불길은 세기가 바뀌어도 사그라질 줄 몰랐고, 그 속에서 힘겹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하층민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다. 생산 수단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던 신흥 (   ①  ) 계급은 대외적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거기에다 권력자들은 무자비한 폭정으로 국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사회에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다. 결국 굶주림과 폭정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은 다시 혁명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1830년의 (   ②   )이다.

(214쪽 참조) ① 부르주아   ② 7월 혁명                  

 

6. 『레 미제라블』은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빵을 훔친 장 발장에게 내려진 처벌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년간 감옥에서 지내면서, 선량했던 그는 점차 악에 물들고 만다. 위고는 가난이 범죄를 낳고, (   ①   )(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정당화되는 수감 생활이 도리어 범죄의 온상이 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를 은연중에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은 식기를 훔친 장 발장을 용서해 주고 구원의 길로 이끈 미리엘 주교의 모습에서, ‘참된 (   ①   )은/는 징벌이 아니라 (    ②    )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 (214쪽 참조) ① 교화   ② 용서와 자비                

 

펼치기

 

1. 아래 두 제시문에서 석저와 자베르가 처한 문제 상황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토론해 보자.

 

(가) 형()나라 소왕(昭王) 때, 석저(石渚)라는 선비가 있었다. 사람됨이 공정하고 사사로운 정()이란 것을 몰랐기 때문에 왕이 치안관으로 일을 보게 했다. 어느 날 길에서 사람이 죽은 사건이 생기자, 석저는 범인의 뒤를 밟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범인이 자기 아버지였다. 석저는 그대로 수레를 돌려 왕궁으로 나아갔다.

“살인범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제 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자식 된 도리로 차마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범인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으로 불가(不可)한 일입니다. 법을 범한 이상 벌을 받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입니다.”

석저는 이렇게 말하고 형틀에 엎드려 왕에게 죽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뒤를 좇았으나 잡지 못한 것뿐이니 어찌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할 것인가. 계속해서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하라.”

하지만 석저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아비에게 정을 두지 않으면 효자라고 할 수 없고, 임금을 섬기며 법을 굽힌다면 충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임금께서 그것을 용서하시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지만, 감히 국법을 어길 수 없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하고 형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여씨 춘추(呂氏春秋)』에서

 

(나) 몇 시간 전부터 자베르는 아주 간단한 일도 뚜렷하게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곤란한 일에 부딪혀도 그토록 단순하고 명쾌하던 그의 두뇌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수정과 같은 맑은 머리에 먹구름이 낀 것이다. 자베르는 자신의 확고한 의무감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느꼈고, 자기 자신한테 이 사실을 속일 수가 없었다. 뜻밖에도 센 강변에서 장 발장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의 마음은 사냥감을 찾은 늑대와 같은 기분과, 주인과 다시 만난 사냥개와 같은 기분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의 입장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악인에게 목숨을 구출 받고, 그 빚을 갚는다. 본의 아니게도 범죄자와 동등한 입장이 되어서, “가라!”고 말해 주었던 자에게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그 은혜에 대한 답례로 “도망쳐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자기의 양심에 충실하려고 한 것이 사회를 배신해 버린 것이다. 이런 부조리한 일이 모두 현실이 되어 그를 내리눌렀다.

이제 방금 자기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그는 몸서리쳤다. 명색이 자베르라는 이름의 그가 경찰의 모든 법규와 모든 사회적 및 법률적인 조직과 법률 조항을 완전히 어기고, 한 죄인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석방해 버린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남은 해결책은 단 한 가지, 급히 롬아르메 거리로 되돌아가서 장 발장을 체포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그의 길을 가로막고 서서 방해했다.

장 발장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의 일생의 지주(支柱)가 되어 있던 공리(公理)가 하나도 남김없이 이 사나이 앞에서 무너져 버린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사실을 상기해 보니, 전에는 거짓말이나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은 진실같이만 생각되었다. 마들렌 씨의 모습이 다시 장 발장의 등 뒤에 나타나, 두 모습이 서로 겹쳐져 단 하나의 존경해야 할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자베르는 무언가 무서운 것이 영혼 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범죄자를 존경하는 감정이었다. 범죄자에 대한 존경,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되자 몸이 떨렸다.

그의 가장 큰 괴로움은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된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뿌리째 뽑혀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의존해 왔던 법전(法典)도 이제 산산조각 난 파편이 되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단 하나의 척도였던 법률적인 확신과는 전혀 다른 감정적인 계시가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 훤히 그의 영혼에 보였다. 즉 그가 받은 자비를 갚아야 한다는 것, 헌신·연민·관용·동정이 미치는 격렬한 힘에는 위엄조차도 무너져 버린다는 것, 인간을 존중하는 것, 결정적으로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인간의 정의(正義)와는 반대로 나아가는 신()의 정의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미지의 도덕이라는 무서운 해돋이를 보았다. 그 해돋이가 무서워져서 눈이 아찔했다. 억지로 독수리의 눈을 갖게 된 올빼미처럼.

…(중략)…

자베르는 암흑의 입구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얼마 동안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뚫어지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찰싹찰싹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모자를 벗어 난간 언저리에 놓았다. 다음 순간, 검고 키 큰 사람 그림자가 난간 위에 똑바로 서서, 강물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가 이내 다시 일어난 후에 어둠을 향해 똑바로 떨어졌다. 이어 희미하게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물속으로 사라진 이 희미한 그림자의 충동적인 행위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암흑뿐이었다.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에서

 

→ 두 제시문에는 서로 다른 소중한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종종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지만 매번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두 제시문의 주인공들이 이러한 ‘문제적’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각각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상황을 분석하고, 그 대처 방식의 적절성 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통찰력과 논리적·주체적 판단 능력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두 주인공과는 다르게 제3의 대안을 찾다 보면,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제시문 (가)는 동양의 고전인 『여씨 춘추(呂氏春秋)』에서 뽑은 것이다. 석저의 일화는 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그 길이는 짧지만 ‘법(法)’ 또는 ‘충(忠)’과 ‘효(孝)’가 서로 충돌하는 딜레마를 극적으로 보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서 효(孝)라는 가치는 부모 자식 간의 개인적 관계라는 사적(私的) 측면과, 천륜(天倫)이라는 인간적 측면,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시되던 윤리적 덕목이라는 공적(公的)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세 측면 가운데 과연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문제를 풀어 가는 방식이 달라질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가)의 주인공 석저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주목해 보자. 그는 소중한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기로 마음먹는다. 특히 ‘공개적 처벌’이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신이 지키지 못한 법(法)의 권위를 되살리고 있다. 개인적 자아의 희생으로 사회적·인륜적 가치를 실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대처 방식은 누구나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세인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한편으로 ‘죄 없는 생명의 희생’이라는 모순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죽음이 더 큰 불효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 제시문 (나)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장 발장’이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용된 부분에서 ‘자베르의 고민’에 얽힌 의미는 새롭게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특히, 앞에 나온 석저 이야기와 나란히 놓고 볼 때 흥미로운 문젯거리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자베르의 상황은 석저의 경우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자베르 역시 ‘사회의 법(法)’이라는 공적 가치와 ‘개인의 양심(良心)’이라는 인간적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양심이란 언뜻 자기가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사적(私的) 요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제시문 후반부에 나타나는 것처럼, 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근원적인 도덕적 가치’라는 측면도 함께 지니고 있다. 작가는 이를 ‘신의 정의’라 표현하는데, 물론 완전히 똑같은 의미라고는 볼 수 없지만 분명 석저의 ‘효(孝)’와 통하는 데가 있다.

다만 석저는 그 가치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반면, 자베르는 그것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자베르는 석저와 달리 남몰래 자살함으로써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결국 자베르의 자살은 양심에 따른 결단이라는 의의를 지니면서도, 그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서 과연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을 남기는 것이다.

이렇게 두 제시문에는 다양한 논의의 실마리들이 얽혀 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 다음 그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를 찾아내어 논점으로 정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토대로 자신의 의견을 주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 학생들의 과제다.

 

+길잡이_ 2003학년도 건국 대학교 정시 논술 고사에 출제된 문제다. 학생들이 석저와 자베르가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여, 두 경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분석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215쪽 참조】 한편 장 발장의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자베르는 법이 최고의 진리라 믿는 냉혈한이었으나, 그 역시 사회의 피해자다.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도리가 아닌,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법을 신봉했다는 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 발장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되자 그는 갈등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만다.

 

마무리하기

 

1. 『레 미제라블』을 쓴 위고의 의도는 무엇인지 토론해 보자.

→ 위고는 역사의 진보를 확신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인간성을 억압하는 모든 사회적 제도와 모순에서 인류가 해방되는 이상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다. 그는 빈곤이 사라지고, 서로 다른 계급들이 화해하고 단합을 이루며,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 사회, 공정한 부(富)의 분배를 바탕으로 한 복지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길잡이_ 작품 내용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토대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에 대하여 학생들 개개인은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발표하게 하여 활발한 토론을 유도한다.

【215쪽 참조】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은 프랑스 어로 ‘비참하고 가엾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하층민들의 밑바닥 인생을 다룬 이 작품에서 위고는 한 인간의 사소한 죄가 어떻게 영웅적인 인내로 보상되는가를 말하면서, 사회의 비인간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작품 서문에 나오는 다음 말이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대변해 준다.

“사회에는 법률과 풍습으로 말미암은 처벌이 존재하고, 그것이 문명 속에 인위적으로 지옥을 만들어 내어 신성한 운명을 인간의 불행으로 뒤엉키게 하는 한, 그리고 이 시대의 세 가지 문제, 프롤레타리아의 탓으로 남자가 낙오되고, 굶주림으로 여자가 타락하며, 어둠 때문에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또 어떤 지역에 사회의 질식 상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한, 다시 말해 더 넓게 보아서 이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 한 이러한 책들이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서문 다음에 실린 서시(序詩) 역시 그 길이는 짤막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단적으로 보여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싸우는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무엇인가. 이기는 것이다. 또 그 다음 문제는 무엇인가. 죽는 것이다.” 위고는 ‘싸우고 이기고 죽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자 관심사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 곧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과 평등 사상, 휴머니즘은 『레 미제라블』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작품이 영화와 뮤지컬 등으로 끊임없이 각색되어 변함없이 사랑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선과 악, 전쟁과 기아, 사랑과 증오, 연민과 비정함 등이 존재하는 한, 세상에서 이와 같은 부조리한 일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레 미제라블』은 영원히 읽힐 것이며, 빅토르 위고라는 이름은 길이 남을 것이다.

 

1. 프랑스의 19세기는 혁명과 반동이 끊임없이 교차되었던 시기다. 1789년 루이 16세의 봉건 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유럽 사회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런가 하면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가 지배하는 왕정복고기가 이어졌다. 1830년 5월 샤를 10세는 광대한 알제리 식민지를 얻은 뒤 국민들의 지지를 확신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왕당파보다 자유주의자들이 더 많은 지지를 얻자, 의회를 해산시키고, 언론을 탄압하면서 선거법을 개정했다. 개정 내용은 도시 중소 상공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귀족에게만 선거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샤를 10세가 9월에 총선거를 다시 실시하겠다고 공표하자, 국민들은 이것을 정치적인 쿠데타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7월 혁명이다. 3만여 명의 시민, 학생, 병사들이 7월 27일에서 29일까지 시가전을 벌인 결과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공화정이 실시될 것이라 믿었던 대다수 민중의 기대와는 달리,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한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었다. 그럼에도 혁명의 여파는 유럽 사회 전체로 퍼져, 각국에서는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