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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평설 /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몽당연필^^ 2013. 1. 3. 17:36

가이드 북 | 세계 명작을 찾아서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권장 수업 시간 : 2교시(100분)

대상 꼭지 : 고교독서평설 2월호 「세계 명작을 찾아서」

참고 자료 : 나쓰메 소세키 지음, 『나의 개인주의』(책세상)

                     나쓰메 소세키 지음, 『런던 탑, 취미의 유전』(을유문화사)

학습 목표 : ① 『도련님』에 담긴 작가의 주제 의식과 비판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 보자.

                     ② 『도련님』에 묘사된 그 당시 일본의 사회상을 우리의 근대화 과정과 비교해서 비판적으로 살펴보자.  

집필자 : 하남석_ 논·구술 전문 유레카 학원 강사

 

들어가는 글

 

“문학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은 피로 피를 씻는 일과 마찬가지다.”

평생에 걸쳐 시대 현실을 고민하며 참된 문학을 구현하려 노력했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남긴 말이다. 그는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❶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지금도 일본의 중·고교 『문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려 있다. 그리고 1,000엔짜리 지폐의 모델로 날마다 일본인들과 만나는 까닭에, ‘국민 작가’라 불리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소세키가 진실로 ‘국민 작가’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문학’이라는 틀을 뛰어넘어 하나의 사상으로서 일본인에게 끼치고 있는 막대한 영향력 때문이다. 그는 동시대의 문제, 곧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서양’이라는 근대의 물결 속에서 충돌하는 전통 규범과 근대적 가치, 그 안에서 숙명적으로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개인의 문제를 고민하고 이를 문학으로 표현했다. 소세키가 통찰한 근대 문명의 모순과 그 와중에 고독과 불신으로 몸부림치는 개인의 운명은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제재다.

1906년에 발표한 『도련님』은 소세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성장 소설로도 볼 수 있으며, 근대화 과정에서 이기적·속물적으로 변해 가는 일본인들을 풍자적 기법으로 재치 있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심화 자료

 

나쓰메 소세키의 생애

 

2000년 6월 일본의 아사히〔朝日〕 신문사에서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과거 천 년 동안의 문학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을 뽑는 ‘천 년의 문학자’ 인기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나쓰메 소세키가 1위를 차지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三端康成, 1899~1972)나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1935~ 〕,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현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를 제치고 1위를 한 것만 보더라도 그는 일본 국민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는 명실상부한 국민 작가다.

나쓰메 소세키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인 1867년, 지금의 도쿄〔東京〕인 에도〔江戶〕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그의 집안은 손꼽히는 명문가로, 대대로 나누시〔名主, 에도 시대 마을의 대표자〕 일을 맡고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 아래에 있었던 나누시는 막부가 무너짐에 따라 점차 몰락했고, 소세키 집안 역시 이제까지 마을 사람들에게서 받아 오던 돈을 받지 못하게 되어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세키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에게는 죽은 전처(前妻) 소생인 두 딸이 있었으며, 소세키 외에도 네 명의 사내아이가 더 있었다. 가뜩이나 생활이 어려워진데다 키워야 할 자녀가 많아서 경제적 부담이 커진 아버지는 소세키의 탄생을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소세키의 어머니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고, 모유(母乳)가 나오지 않아서 남의 젖을 얻어 먹인 적도 있었다.

이러한 집안의 사연 때문에 소세키는 태어나자마자 곧 요쓰야〔四谷〕에 있는 고물상 집에 수양아들로 보내졌다. 그랬다가 양부모의 사정 때문에 갓 돌이 된 1868년 무렵 되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오바라 쇼노스케〔鹽原昌之助〕라는 사람의 집에 다시 양자로 보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876년 본가로 되돌아왔다.

그 뒤 소세키는 제일 고등 중학교를 거쳐 1890년 도쿄 제국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일찍부터 한시(漢詩)를 읊고 하이쿠〔俳句〕❷를 짓는 등 한학에 남다른 관심과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서구화·근대화가 대세인 현실에서 영문학 연구를 평생의 업으로 여겼으며, 소설가가 될 생각은 아예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도쿄 고등 사범학교 강사를 거쳐 1895년부터 이듬해까지 시코쿠〔四國〕의 마쓰야마〔松山〕 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규슈〔九州〕의 구마모토〔熊本〕에 있는 제5 고등학교로 옮겨 교감 대리를 지냈다. 근대 일본의 한복판에서 나고 자라, 최고 명문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교육자가 된 그의 경험은 『도련님』에 잘 나타나 있다.

20세기가 시작되던 1900년 10월, 서른넷의 소세키는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가는 도중에 파리에 들러 만국 박람회를 관람하면서 그 당시 눈부시게 발달한 서구 문명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일기장에 “밤에 하숙집 3층에서 곰곰이 일본의 앞날을 생각했다. 일본은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은 안목을 좀 더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썼다.

메이지 유신과 거의 동시에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지식인이었던 그에게도 그 무렵 최첨단을 달리던 근대 도시 런던에서의 체험은 쉽사리 넘기 힘든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구 문명과 서구인에 대한 부러움, 그들보다 ‘못난’ 자기 자신에 대한 멸시는 유학 시절 내내 소세키를 괴롭혔다. 서구 근대 문명의 위력에 주눅 든 그는 ‘무서움’을 느낀 나머지,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자란 일본인이 영문학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영문학에 기만당할 것 같은 불안’에 떨게 되었다.

그러나 소세키는 차츰 서구 문명의 그늘진 뒷면을 보게 되고, 그 결과 서구 문명을 ‘실패작’으로 인식하며 세계관의 전환점에 이르렀다. 그 당시 한 지인(知人)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오늘날 유럽 문명의 실패는 분명히 빈부 격차가 그 원인입니다. 이 불균형이 숱하게 존재하기에 매년 사람들을 아사(餓死)시키거나 동사(凍死)시키며, 배움의 길을 막고, 오히려 평범한 부자로 하여금 어리석은 주장을 실행하게 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합니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소세키는 1903년 제일 고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모교인 도쿄 제국 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을 갓 졸업할 무렵부터 일본인으로서 영문학을 연구하는 일에 불안과 허망함을 느끼고 있던 그는 영국 유학을 다녀온 뒤 더욱 교직 생활에 불쾌감을 가졌다. 그러던 차에 1905년 친구의 권유로 발표한 첫 장편 소설이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다.

이 작품에서 소세키는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양이는 그 당시 최고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집주인의 위선과 나약함을 직시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쥐라고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이 ‘특별한’ 고양이의 안목은 바로 런던에서 이방인으로 고생하며 터득한 작가 자신의 안목인 것이다.

그 뒤 여러 작품이 잇달아 호평을 받으면서 소세키는 1907년 도쿄 제국 대학 영문과 교수 직을 그만두고,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면서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는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하게 되었다. 한·일 병합(1910)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 소세키는 일본의 근대화가 해외에 대한 침략주의로 변질되어 식민지 경영이 진행되고 있던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이미 메이지 일본과 근대 서양의 경계를 체험한 바 있는 그는, 그때까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되어 가는 또 다른 동양을 목격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인들이 서구화와 군국주의에 열중해 있을 때 그는 이 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하여, 성급한 서구화의 문제점과 군국주의의 폭력성을 엄중히 경고했다.

소세키는 그런 다음에도 계속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힘쓰다가, 1916년 12월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어 마흔아홉이라는 아까운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주옥같은 문학 작품 외에도 해학적이면서도 따스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일화를 여러 개 남겼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세키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강의 도중,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 하나가 소세키의 눈에 띄었다. 완고하고 엄격했던 그는 그런 식의 무례한 수업 태도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

“자네, 어서 주머니에서 손을 빼게나.”

하지만 학생은 그 말을 듣고도 한쪽 손을 빼지 않았다. 화가 난 소세키는 이번에는 직접 강단 아래로 내려가 그 학생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 불손한 자세로 강의를 듣는 건 예의가 아니네. 알아들었으면 어서 그 손을 빼게.”

그러자 학생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교수님, 저는 한쪽 팔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세키는 깜짝 놀랐다. 제자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고 다그쳤던 것이 자못 미안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곧 미소를 지으며 제자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여보게, 교수인 나도 지금 없는 지식을 억지로 짜내서 수업을 하고 있으니, 자네도 없는 팔 한쪽을 드러내 주지 않겠나.”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세계와 그 영향

 

나쓰메 소세키가 창작에 힘쓰던 시기는 메이지 시대의 후반기이자, 근대화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던 때였다. 유신 초기부터 서구 문명을 정책적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일본은 빠른 속도로 국력 신장을 이룩했다. 이러한 부국강병 정책을 통해 일본은 청·일 전쟁(1894~1895)과 러·일 전쟁(1904~1905)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제국주의적인 군비 확장 때문에 민생(民生)에는 소홀하자, 일본 국내 노동자와 서민들의 불만은 계속해서 높아만 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사회적인 병리 현상을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려 한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전통적인 인습의 타파와 사회 모순의 분석·폭로를 목적으로 한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은, 러·일 전쟁 이후 차츰 작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신변잡기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고백 문학으로 바뀌어 갔다.

한편 이러한 고백적 경향에 반발하여 한 무리의 작가들이 생겨났다. 문단에서 독립적인 입장을 취한 이 ‘반자연주의 작가’들은 세상에서 동떨어졌다는 비판적 의미에서 ‘고답파(高踏派)’ 또는 ‘여유파(餘裕派)’라 불렸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나쓰메 소세키로, 그는 빠른 속도로 변모해 가는 사회 현실을 ‘풍자’라는 기법을 써서 비판했다.

한편 소세키는 일본의 근대화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그 역시 근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했다. 하지만 개인적·물질적 가치만을 강조하는 서구 문명을 모방하다가 전통 규범과 윤리가 무너져 가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는 개탄을 금치 못했다. 또 부국강병 정책이 군국주의적 색채를 띠며 변질되어 가는 과정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소세키는 ‘가장 일본인다운 일본인’이자 ‘가장 일본인답지 않은 일본인’이었다. 또 낯선 근대 앞에서 공포와 희망을 동시에 느꼈던 ‘시대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문학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그의 다층적인 측면을 고찰하면서, “소세키만큼 다양한 장르와 문체를 구사한 작가는 일본뿐 아니라 외국에도 다시없을 것이다. 이 다양성은 하나의 수수께끼다.”라고 평했다. 가장 대중적인 문학이면서도 가장 진지한 순문학(純文學)으로 평가되는 소세키의 소설들. 그는 시대의 현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수용하지도 않은, 근대성의 중간에 놓인 ‘비판적 개인주의자’로 평가된다.

한편 소세키의 문학은 중국의 루쉰〔魯迅, 1881~1936〕이나 조선의 이광수(1892~1950)를 비롯한 동아시아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각 나라가 처한 현실은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반봉건(半封建)’을 기치로 내걸어 서구적 근대화의 길을 추구하면서도 서구의 침략적 제국주의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공통점, 다시 말해 ‘동아시아의 근대’를 고민하던 지식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루쉰의 경우 소세키의 풍자적인 표현 기법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광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효시’인 이광수의 『무정』(1917)과 소세키의 『도련님』사이에는 문학적 설정상 비슷한 점들이 눈에 띈다. 우선 이 두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청년이다. 『도련님』의 주인공은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23세의 청년이다. 그는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형과 헤어져 도쿄에서 물리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월급 40엔을 받기로 하고 시코쿠의 한 중학교 수학 교사로 부임한다. 한편 『무정』의 주인공인 형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경성 학교 영어 교사가 된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아버지의 친구인 문명 운동가 박 진사 문하의 서생(書生)이 되어 성장한 24세 청년이다.

이 두 주인공이 모두 ‘청년 교사’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은 작품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교사라고는 해도 혜택받은 인물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몰락 계급의 대표’라 표현하는 편이 옳다. 부모의 살뜰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이 두 사람이 살아가는 근대 사회의 모순과 갈등은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암시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도쿄에서 시코쿠로’, ‘일본에서 경성(서울)으로’라는 생활공간의 이동은 서구 문명(또는 일본 문명)과 전통 문명과의 갈등, 신시대와 구시대와의 갈등, 새로운 윤리와 전통 윤리의 대결 등을 암시하는 설정이라 할 수 있다. 또 ‘20대 청년’이라는 연령상의 특징인 ‘정열, 미완성, 불확실성, 가변성’ 그리고 더 나아가 교사로서 가져야 할 신념과 의지 또는 선구자적인 태도를 도련님과 형식이 어떻게 스스로 갖추어 가며, 눈앞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어떻게 대처해 가는가 하는 것은 두 작품의 공통적인 모티프다.

 

수업 활동

 

터 잡기

 

1.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 고민했던 작가다.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계기인 메이지 유신에 관해 알아보자.

→ 17세기 이래 쇄국 정책을 고수했던 일본 각지에서는 하급 무사들이 주축이 되어, 외세를 내쫓자고 주장하는 양이(攘夷)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유럽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막부를 무너뜨리고 국왕 중심의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1868년 반(反)막부 세력을 규합하여 국왕 중심의 새 정부를 수립했다.

메이지 정부는 종래의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한 274개의 번(藩)을 폐지하고 전국을 3부(府) 72현(懸)으로 재편하여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이로써 일본은 무사 계급 중심의 봉건 사회에서 탈피하여, 아시아 최초로 근대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제철소, 조선소, 방직 공장을 중심으로 근대 공업을 육성함으로써 산업 혁명을 추진했으며, 화폐 개혁과 국립 은행 설립 등으로 근대화를 이루어 나갔다. 또 서양의 근대 사상과 학문을 적극 도입하여, 국민 사상을 전환시키고 근대적 교육 제도를 마련했다. 하지만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룬 뒤에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이는 등 군국주의의 색채를 짙게 띠게 되었다.

 

+길잡이_ 학생들에게 메이지 유신에 관한 자료를 조사해 오도록 해서 그 결과를 발표시켜 본다. 또 이를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비교해 살펴보도록 이끈다.

 

※ 『도련님』 평설에서 발췌한 지문이다. 알맞은 단어로 괄호 안을 채우시오. (2~4)

 

2. 일본은 서구 유럽을 (  ①  )의 모델로 삼았기에, 서양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전통 규범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었고 공동체적 삶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회 전반에 개인주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고, 물질적 가치를 정신적 가치보다 중시하는 (   ②   )도 널리 퍼졌다.

이러한 때 나쓰메 소세키는 (  ①  )가 불러올 정신문화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당시 일본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群像)을 자세히 묘사하고 비판과 풍자의 칼날을 들이댄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면서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중·고교 『문학』 교과서에 이광수와 김동인의 작품이 빠지지 않듯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역시 일본 중고생들의 필독서로 손꼽힌다.

(216쪽 참조)   ① 근대화   ② 물질 만능주의

 

3. 도련님이 (  ①  )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겉과 속이 다른 야비한 인간들이었다. 하숙집 주인을 비롯해 학생들까지 비겁한 행동을 일삼는다. 무엇보다 도련님은 어느 곳보다 깨끗해야 할 교직(敎職) 사회가 온갖 (  ②  )에 좌우되는 현실에 분노한다. 교사인 동시에 지식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버젓이 저지르는 교감 ‘빨간 셔츠’와 미술 교사 ‘떠버리’가 존경을 받는 것이다. 물론 수학 주임 ‘멧돼지’처럼 강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도 있고, 영어 교사 ‘끝물 호박’ 선생처럼 점잖고 훌륭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는 사람은 비겁한 악당들이었다.

(218쪽 참조)   ① 시코쿠  ② 권모술수

 

4. 나쓰메 소세키는 지식인으로서 항상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근대화가 일본 사회의 정신사에 끼친 영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문학과 영문학에 모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특히 (   ①   )라는 두 가치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 같은 초기작이 (    ②    )에 초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그 후』를 비롯한 후기 작품들은 (    ③    )를 다루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런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나’라는 존재는 ‘전통’이라는 뿌리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 그는 가치의 혼란 속에 갈등하는 개인의 모습을 그린 작가이자 근대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상가였다. 12년이라는 짧은 창작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역시 (     ①     )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19쪽 참조)   ① 전통과 근대화   ② 근대 문명 비판   ③ 자아에 대한 탐구

 

펼치기

 

1. 소문이나 평판으로 형성되어 나타나는 타인의 시선은 개인의 행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음 세 제시문을 논의의 근거로 삼아, 타인의 시선이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자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토론해 보자.

 

(가) 시코쿠에 온 지 겨우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혼란스럽게 한 일은 멧돼지와 빨간 셔츠 가운데 누가 나쁜 쪽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멧돼지를 좋게 보고, 빨간 셔츠를 나쁘게 보았다. 그런데 숙직실 사건이 있은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사건이 난 직후, 빨간 셔츠는 나를 은밀히 불러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 주의하지 않으면 이번 일이 더 험악해질 걸세.”

사실 나는 내가 파면되든 학생들에게 정식 사과를 받든 둘 중 하나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험악한 일은 다 각오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학교라는 곳은 온갖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곳이기 때문에 자칫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용당할 수도 있어. 특히 하숙집 같은 걸 소개해 주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정직하기만 하면 누구한테 이용당한다 해도 두려울 건 없습니다.”

빨간 셔츠는 호호호호 웃었다. 나는 웃음을 살 만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빨간 셔츠의 웃음은 나의 단순하고 솔직한 점을 비웃은 것이다. 대체로 세상 사람들은 어쩌다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애송이’, ‘도련님’이라 부르며 곯리려고만 든다. 기요라면 절대 이럴 때 웃지 않는다.

그렇지만 빨간 셔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다. 그가 말한 요주의 인물은 분명 멧돼지다. 그러고 보니 이번 기숙사 사건도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는 멧돼지가 꾸민 일이 아닌가 싶었다. ― 나는 성격이 워낙 단순한데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남의 말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곧잘 말재주가 좋은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곤 하는데,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 멧돼지를 굳게 믿었던 만큼 배신감이 컸다. 물론 뒤에서 남의 흉을 보는 빨간 셔츠의 행동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껏 이야기를 다 하고 멧돼지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폭로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한 것도 우스웠다.

 

(나) 서로 잘 알고 있으며 또 개인적인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있는 집단에서는 매우 강력하면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통제 메커니즘이 일탈자나 일탈할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 항상 발휘된다. 그것은 설득, 조롱, 쑥덕공론(gossip), 비난 등의 메커니즘이다.

일정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집단 토론의 경우 개인들은 그들이 처음에 지녔던 의견을 수정해서 집단 규범이라 할 다수의 의견에 일치시킨다. 그 집단 규범이 어떤 성격을 지닐 것인가는 그 집단의 구성원에 달려 있다. 집단 역학(group dynamics)의 놀라운 현상이라 할 이 피할 길 없는 의견 일치의 압력 밑바닥에는 아마도 어떤 집단에 수용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깊은 욕망이 놓여져 있을 것이다. 그러한 욕망은 선동가나 여론 형성 전문가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극히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조롱과 쑥덕공론은 모든 종류의 1차 집단에서는 사회 통제의 강력한 도구이다. 많은 사회는 조롱을 어린이에 대한 주요 통제 수단의 하나로 이용하고 있다. 어린이가 순종하는 것은 벌받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비웃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는 경우 몸이 오싹하는 두려움을 경험한다. 또한 쑥덕공론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이웃에 의해 감시당할 가능성이 많은 작은 공동체에서 특히 효과적이다. 그러한 공동체에서는 쑥덕공론이 의사소통을 위한 주요 통로의 하나이며 사회 조직을 유지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조롱과 쑥덕공론 역시 그것의 전달 통로에 접근할 수 있는 영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다) 당신이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 도대체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느냐, 누가 얘기했느냐고 당신은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소문이라는 놈이 알려 준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뭐라고? 그렇다면 나도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사람이란 말인가?" 하고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대단찮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지방에서는 거물일 수도 있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먹는지, 잠은 얼마나 자는지,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듣고 싶어하고 또 잘 알고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런 만큼 당신은 일상생활에서 행동거지를 더욱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살아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행복하구나 하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집 안의 벽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생활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문지기를 두게 된 것도 양심의 거리낌 때문이지 명예나 긍지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떳떳치 못한 짓을 하고 있는 현장이라도 들킬까 봐 불안해하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을 숨겨 남의 눈이나 귀로부터 벗어났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 없으면 군중의 시선은 환영할 만한 것이 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는 혼자 있어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법이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떳떳한 일이라면 모든 사람이 알아도 상관이 없을 것이고, 추악한 일이라면 당신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에는 남들이 알든 모르든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라) 인쇄업자로서의 신용과 평판을 지키기 위해 나는 실제로 근면하고 검약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일은 피하도록 주의했다. 나는 옷을 수수하게 입었고, 노는 데는 나가지를 않았다. 낚시질도 사냥도 하러 나가지 않았다. 이따금 책을 읽기 위해 손에서 일을 놓아야만 할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드문 일인데다가 남의 눈에 띄는 일도 아니었으며 나쁜 평판을 들을 일도 아니었다. 또 나는 열심히 장사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여러 상점에서 산 종이를 손수레에 싣고 일부러 거리를 달려 집까지 오곤 했다. 이와 같이 해서 나는 부지런하고 유망한 청년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또 산 물건 값은 꼭꼭 지불했으므로 문구류 수입상들이 나와 거래하고 싶어 했고 책을 공급해 주는 사람도 늘어나 매사가 순풍에 돛 단 듯이 진척되어 나갔다.

나는 또한 겸손이란 덕목에 있어서도 진정으로 겸손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토론을 할 때, 나는 타인의 주장에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의 의견을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나 참기로 했다. ‘확실히’나 ‘틀림없이’ 등의 표현 대신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든지 ”현재 내게는 이렇게 생각된다." 등의 조심스런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런 겸손한 태도는 내 타고난 천성은 아니어서 처음에는 억지로 해 본 것이나,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나의 습관이 되었다.

 

제시문 (가)는 『도련님』에서 발췌한 것으로, 주인공 ‘나’는 ‘숙직실 사건’을 겪고, 빨간 셔츠의 비방을 듣고 나서는 그간 좋게 생각했던 멧돼지 선생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특히 말재주 좋은 사람에게 잘 속아 넘어간다는 본인 스스로의 말을 참고해 볼 때, 이는 남들의 평판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하게 되는 평범한 개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제시문 (나)는 사회 조직을 유지시켜 나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서 통제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메커니즘은 바로 설득과 조롱, 쑥덕공론, 비난 등 타인의 ‘평판’을 가리킨다.

한편 제시문 (다)는 ‘중인환시(衆人環視), 곧 자신을 에워싸고 지켜보는 여러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살아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은 행복하다고 여겨도 좋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타인의 시선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행동 양식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제시문 (라)는 성공하기 위해서 타인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어 내려는 개인의 노력을 보여 준다. 이 각각의 제시문에 나타나 있는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본 다음, ‘타인의 시선을 아주 무시해 버리거나, 크게 의식하며 살아가게 되는 개인의 행동 양식’ 가운데 어떤 삶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관한 각자의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곧 제시문 (나)나 (라)를 통해서는 ‘개인은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가야 하고, 그것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사실 ‘남이야 어찌되든 나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의 행동은 사회를 타락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이와는 달리 제시문 (다)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대인 관계에서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주체적인 삶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제시문 (가)처럼 타인의 목소리에 휘말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 비판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견해를 인정하고 종합하여 타인과 건전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행동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다만 타인을 의식하되, 그 관계가 위선적인 것이라면 오히려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늘 성심(誠心)으로 생활하고 자신의 참모습을 찾으려 애쓰는 동시에 타인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갈 때, 타인도 ‘나’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길잡이_ 논제와 제시문들은 2003학년도 이화 여자 대학교 정시 모집 논술 고사 문제에서 활용한 것이다. 학생들이 각각의 제시문을 논제와 연관 지어 꼼꼼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보게 한다.

【218쪽 참조】 도련님이 시코쿠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겉과 속이 다른 야비한 인간들이었다. 하숙집 주인을 비롯해 학생들까지 비겁한 행동을 일삼는다. 무엇보다 도련님은 어느 곳보다 깨끗해야 할 교직(敎職) 사회가 온갖 권모술수에 좌우되는 현실에 분노한다. 교사인 동시에 지식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버젓이 저지르는 교감 ‘빨간 셔츠’와 미술 교사 ‘떠버리’가 존경을 받는 것이다. 물론 수학 주임 ‘멧돼지’처럼 강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도 있고, 영어 교사 ‘끝물 호박’ 선생처럼 점잖고 훌륭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는 사람은 비겁한 악당들이었다.

결국 빨간 셔츠의 계략으로 끝물 호박 선생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흥분한 도련님과 멧돼지는 빨간 셔츠에게 하늘을 대신해서 벌을 내리기로 마음먹는다. 두 사람은 미처 뜻을 이루기도 전에 폭력 사건에 휘말려 학교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지만, 끝내 빨간 셔츠와 떠버리를 혼내 주고 그 지긋지긋한 곳을 떠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는 통쾌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행동에 옮기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응어리를 ‘도련님’이 속 시원하게 풀어 준 데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비열한 무리에 저항하던 멧돼지와 도련님이 학교를 떠나게 되는 결말 부분에서 정의가 승리하지 못하는 현실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당시 일본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시코쿠는 메이지 유신 이후 기존 가치관과 규범이 흔들리고 있던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다.

 

마무리하기

 

1. 『도련님』에 나타난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고, 근대화·서구화가 일본인들의 의식과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 토론해 보자.

→ 나쓰메 소세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국민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하지만 그는 일본적인 감성이나 미의식에 유난히 집착하지도 않았고, 가장 일본적인 것을 최상으로 여기는 국수주의적 입장과도 거리를 두었던 작가다. 그는 서구의 가치 기준에서 독립할 것을 요구하는 ‘자기 본위 사상’을 부르짖었고,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에 입각한 근대화를 역설했다.

소세키의 이 같은 사상은, 서양 문물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른 결과 근대화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반작용으로 서양에 대한 정신적 예속을 감내해야 했던 일본인들에게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여 주었다. 특히 『도련님』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적 가치를 좇다가 속물적으로 변해 가는 인간 군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근대화에 관한 소세키의 인식은 여전히 서구적 근대화의 물결 속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그의 ‘자기 본위 사상’은 때로는 자민족 중심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인식이 부차적일 때도 있었다. 이는 일본 사회의 외부에서 볼 때, 특히 일본 식민지였던 우리의 눈에는 ‘나쓰메 소세키라는 작가의 타자 인식에 대한 한계’로 비친다.

 

+길잡이_ 나쓰메 소세키의 사상과 작품 세계의 의의 및 한계에 관하여 토론하도록 유도한다.

【216~218쪽 참조】 일본은 서구 유럽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기에, 서양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전통 규범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었고 공동체적 삶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회 전반에 개인주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고, 물질적 가치를 정신적 가치보다 중시하는 물질 만능주의도 널리 퍼졌다.

이러한 때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화가 불러올 정신문화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당시 일본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群像)을 자세히 묘사하고 비판과 풍자의 칼날을 들이댄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중략)…

그러나 비열한 무리에 저항하던 멧돼지와 도련님이 학교를 떠나게 되는 결말 부분에서 정의가 승리하지 못하는 현실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당시 일본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시코쿠는 메이지 유신 이후 기존 가치관과 규범이 흔들리고 있던 일본 사회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질수록 인간성은 나날이 황폐해져 가는 것이야말로 근대 사회의 모순이 아닐 수 없는데, 작가는 이를 재치 있는 해학과 풍자로 풀어낸다. 그리고 여기에는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인간의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이 점차 설자리를 잃어 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지식인으로서 항상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근대화가 일본 사회의 정신사에 끼친 영향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문학과 영문학에 모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특히 전통 근대화라는 두 가치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 같은 초기작이 근대 문명 비판에 초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그 후』를 비롯한 후기 작품들은 자아에 대한 탐구를 다루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런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나’라는 존재는 ‘전통’이라는 뿌리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 그는 가치의 혼란 속에 갈등하는 개인의 모습을 그린 작가이자 근대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상가였다. 12년이라는 짧은 창작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작품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역시 전통과 현대화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메이지 유신의 시기는 대체로 1853년에서 1877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M. C. 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오면서 유신의 싹이 텄다. 일본은 1854년 미국과 화친 조약을 맺은 데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幕府)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反幕府) 세력은 막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 결과 300여 년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했고, 그 이듬해 대정 봉환(大政奉還)·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학제와 징병령 그리고 토지세인 지조(地租) 제도를 개정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구미(歐美) 근대 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관(官)의 일방적인 주도 아래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적 통일 국가를 이루었는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입헌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어, 천황제에 입각한 절대주의를 국가 구조의 모든 분야에 실현시켰으며,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강압적·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1894년의 청·일 전쟁 도발, 1904년의 러·일 전쟁 도발에 이어, 무력으로 대한 제국을 병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2. 하이쿠_  5·7·5의 17음(音) 형식으로 된 일본 고유의 단시형(短詩形). 에도 중기 이후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그 문학성이 크게 부각된 장르다. 해학적이고 응축된 어휘로 인간의 심리와 사물의 현상을 재치 있게 표현하여, 와카〔和歌〕와 함께 일본 시가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 제 블로그의 독서평설 자료는 9594 박전현 국어교사 카페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