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낙서 / 그리움, 열정의 시작

몽당연필^^ 2012. 5. 8. 11:10

그리움, 열정의 시작

 

                                                

 

 

개교 기념일이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처럼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건전하지 못한 게으른 방법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다. 아침 산책을 나가든지 가까운 산으로 산행이라도 가면 기분이 상쾌해 질 것인데 운동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귀차니즘으로 누워서 돋보기 쓰고 책이나 보고 있다. 엎드리면 거리 조정이 잘 안되고 팔을 멀리 뻗어야 글자가 잘 보이므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나이 들면 창 넓은 서재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단아하고 고상하게 책 읽는 것이 꿈이었는데 한 시간만 봐도 눈 아프고 팔 아프고...

 

아참, 오늘이 어버이 날이기도 하다.

찾아갈 부모님도 안 계시고 꽃 달아줄 아들 넘들도 멀리 있으니 그냥 출근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아무튼 오늘은 나의 날이니 직장 일은 내려놓고 사각의 공간에서 생각의 자유를 누리리라.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걸 몸으로 실감하면서 우울에 빠져 몇 주간을 보냈다. 우울한 시를 읽고, 우울한 음악을 듣고, 우울한 생각을 하고... 외롭다는 것은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있던 친구가 어느 날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어지는 사람에게 이유를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른 아침 누운 채로 책을 뒤적이다가 그리움, 열정의 시작이란 글을 보았다. ‘그리움’, ‘열정이란 단어에 벌떡 일어나서 다시 읽어 보았다. 아직도 이런 단어에 민감하다는 것은 열정이 숨어 있다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옛날에 좋아했던 그 사람의 존재는 지나고 생각하면 참 따뜻하고 든든하다. ‘그 사람의 실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사람의 존재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막연한 심리적 도피처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탓이다.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이 말한 것처럼 경험하는 자기기억하는 자기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좋고 나쁜 많은 일들을 함께 경험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게 헤어진 연인에 대해서는 좋았던 것만, 나쁘게 헤어진 연인에 대해서는 나빴던 것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좋아했던 누군가를 떠올리다 보면 그 시절이 마냥 아름답게 되살아난다. 그러나 추억 속에 미소 짓다 거울을 보면 갑자기 우울하고 처량한 기분도 든다.-

 

여기까지 읽다가 나를 돌아본다.

그렇다. 심리적 도피처- 나를 합리화 할 수 있는 전문 용어를 찾았다. 현실이 힘들 때 보따리 싸서 갈 곳은 없어도 마음으로 도피할 수 있는 곳, 지금 내겐  '심리적 도피처'가 필요하다. 그런데 내게 심리적 도피처는 누구였던가? 물론 남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도피처를 말한다.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지만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다만 기억하는 자기가 존재하는 것 아닐까? 내겐 항상 누구가 아닌 무엇이 있었을 뿐이다. 20 대에 미친 듯이 책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30대에 문학만을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서른의 마지막쯤 그림에 빠져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교류가 아닌 혼자만의 도피처였고 모두 객기였다. 열정이 아니었다.

 

40대 다시 한 번 공부에 빠져라.

그랬다. 누구에게 유혹당하고 싶었지만 이미 불혹이었다. 아무 것에도 유혹되지 않는다는-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공부에 빠져 있던 내 불혹의 시작, 어쩜 그것은 그리움에서 시작된 열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까지의 모든 그리움을 견디고 일어설 수 있게 해 준 열정- 꿈이 있었다. 적어도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꿈- 정말 아무 것에도 유혹되지 않고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더 이상 욕심 없이 열심히 살았던 사십대였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벗어나는 것만 열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모임 하나 갖지 않고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직장과 집만 오가며 여기까지 왔다. 적어도 직장에서만은 누가 봐도 나를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열정을 다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름답고 평온해야 하는데 허무하다.

 

나는 어느새 50대가 넘었다.

모든 걸 늦게 시작하다 보니 어디서건 나이가 많다는 걸 느낀다. 그러나 나이 많은 티를 내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날 휴학하고 있는 아들이 전화로 기쁜 일이 있다고 말했다. 자기가 알고 있던 나이보다 한 살이 적다는 것이다. 나도 매년 달라지는 내 정확한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르겠다. 친구한테 물어봐야겠다. 이렇게 사각의 공간에서 음악이라도 듣고 있으면 난 아직도 생각이 이십 대인데 왜 이렇게 열정이 없어진단 말인가? 모든 것이 시들해진다. 그리워할 누군가가 있으면 열정이 되살아날까? 지금 이 나이에 실제로 무엇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나 심리적 도피처를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내 마음 속의 심리적 도피처’, 그것이 사람이라면 어쩜 열정이 되살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고개를 흔들고 만다. 知天命이라 하지 않았던가?

 

천지가 연둣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 빛나는 계절, 내 마음 속에서 사라져 가는 열정-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