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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그리운 우리 아그들 (2011. 5)

몽당연필^^ 2012. 5. 14. 23:47

그리운 우리 아그들



          


          


         

 

눈이 부시게 푸르른 오월, 시월 하늘이 아니라도 사방 초록이 눈부시고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그리운 이들을 아름다운 마음으로 그리워하게 하는 오월이다. 지금쯤 학교 교정에는 줄장미가 만발했을 것이다. 야생화 동산에는 용의꼬리, 범부채, 노루귀꽃이 피었을 테고 연못가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싸리꽃이 만발했을 것이고 1학년 2반 창밖 화단에는 꽃 능금이 조그맣게 맺어 있을 것이다. 1번 수미는 시크한 표정으로 궁금증을 풀어놓을 것이고 2번 예진이는 언제나 모범적인 자세로 열심히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일 것이고 눈썹이 새까만 3번 소영이는 수학 교과서를 내놓고 있을 것이며 4번 수진이는 선생님보다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며... 30번 혜민이는 언제나 조용하고 수줍게 선생님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학교에 출근하지 않은 기간이 벌써 두 달이 넘었다. 개인적인 사정(사실은 계약이 끝남)이 있었고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서 한 학기를 쉬기로 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만나지 못한 지가 두 달이 되었는데 그동안 할 일이 많아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늦게 시작한 직장 생활 거의 20, 교직에 몸담고 있었던 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느라 오히려 하루도 쉴 날이 없다.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육체적으로 피곤하기도 하다.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이라 재미있기도 하지만 하지 않던 일들이라 힘들기도 하다. 열과 성을 다해서 학교생활을 했고 학생들과 깊이 정이 들었지만 할 수 없이 떠나야만 했던 종업식 날, 아이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며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정 들었던 4년간의 생활을 접고 아쉬운 인사를 하고 짐을 싸서 집에 오던 날, 때늦은 2월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작년 입학식 무렵에도 함박눈이 내려서 새로 만난 우리들은 새로운 시작을 사진에 담아 추억을 만들었었는데 종업식 날도 눈이 내렸다. 짐을 정리해서 돌아오는데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함박눈 때문에 앞이 자꾸만 흐려져 왔다. 정년 퇴임을 하신 교장 선생님의 문자, 학생들에게 쏟던 선생의 열정을 생각하니 내가 눈물이 나려고 한다.’ 아마 그 교장 선생님도 떠날 때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짐을 풀지 않은 채 열흘이 지나고, 나는 잠시 날짜와 요일을 명심하지 않은 채 방학처럼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850. 이른 시간인데 문자 신호가 울렸다. ‘선생님 왜 안 오세요?’‘선생님, 어디 계세요?’ ‘선생님, 어디로 가셨어요?’ ‘선생님, 우리 반은 다 모여 있는데 선생님만 안 보여요달력을 보니 32일 입학식, 새 학년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 출근을 해야되는데... 줄줄이 들어오는 문자를 보고 나는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어야 하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문자를 보낸 학생들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와락 감정 조절을 할 겨를도 없이 슬픔의 덩어리가 목을 타고 넘어오고 말았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던가? 휴대폰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한참을 울었다. 소리 내어 이렇게 울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나? 감정 조절을 하지 않고 바로 표현해 본 지가 얼마나 되었나? ‘울다라는 단어조차도 외면하면서 몇십 년을 억눌러 왔던 서러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때까지 있었던 모든 이별을 다 떠올리며 가장 슬프게 가장 자유롭게 감정표현을 하고 있었다.

 

이별이란 이렇듯 언제나 아픈 것이다.

이별이 슬픈 것은 그동안의 정 때문이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있는데 선생님만 안 보여요.’ 이 말 한마디가 모든 슬픈 이별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가슴을 아리게 했다. 지난 일 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3, 환경 미화를 한다고 남아서 며칠을 분주하게 준비를 했던 우리, ‘교실을 깨끗이가 우리 반 1순위 목표였고 그래서 학생들은 오히려 1순위 불만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린 우수상을 받았고 청소 잘하는 모범반으로 칭찬을 받았다. 모든 면에서 칭찬을 받았던 우리 반, 체육대회에서도 토끼 복장을 한 우리들의 응원은 다른 반보다 단결이 잘 되어서 응원상을 받기도 했다. 합창대회는 우리들에게 분열과 아픔을 주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열심히 노력해서 지휘상도 받았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예상외로 등위 안에 들지 않아 속상해 했으나 열심히 한 다른 반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가지자고 스스로 위로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한 학생들이 너무 예뻐서 30명 전원에게 1등에 해당하는 상품권을 주었다. 내 말을 너무나 잘 따라준 30명의 모범생들, 정말 딸 같은 학생들이었다.

 

여고를 졸업한 지 몇십 년 만에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스승의 날 행사를 갖는다고 연락이 왔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를 기억이나 하실까? 생각하며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참석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우리 반 혜림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스승의 날에 작년 우리 반 학생 전원과 만나자고 하는 전달이었다. 실장과 연락을 해서 일단 장소를 문화예술회관으로 정했다. 오후 130, 그리운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수리움 화분과 케이크를 사 들고 온 변함없이 이쁜 우리 반 딸래미들, 난 변함없이 잔소리를 하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포옹했다. 남들이 보면 이산가족들 만나는 줄 알겠다. 그런데 왜 아무도 눈물을 안 흘려? 라고 하며 애써 태연한척 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못 온 4명을 제외하고 스물여섯 명이 모였다.

 

우린 햄버거를 나눠 먹고 수다를 떤 뒤 봉사활동으로 청소를 하자고 했더니 선생니임-’ 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손가락을 입에다 대고 조용히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하나도 안 무섭단 말이지? 그렇지, 오늘은 내가 너희들 의견을 존중해 줘야겠지?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나는 마음이 조금 울적해서인지 몸이 피곤했으나 가방을 빼앗아 가는 녀석들 때문에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머물다가 나오려고 했는데 어디쯤에서 나와야 할지 기회를 찾지 못했다. 1번부터 30번까지의 노래를 다 들어야 하니 누구 노래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한 곡도 아는 노래가 없고 재미없어도 다 듣고 나와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신청곡에 스승의 은혜가 있었다. 모두가 일어서서 스승의 은혜를 3절까지 불러줬다. 이 노래가 3절까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학생들과 포옹을 하며 벅찬 감동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나 보다. 학생들은 나를 놀리느라 울지 마를 외쳤고 내가 조용히 해하고 큰소리로 명령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숙연한 분위기를 깨고 한바탕 웃음으로 노래를 끝냈다. 학생들이 부른 노래 제목을 모두 노트에 적어서 다음 만날 때는 이 노래들을 꼭 배워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다시 교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고, 방학 때 다시 만나자고 약속은 했지만 사실 이 녀석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새 내 나이 오십이 훌쩍 넘었고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기엔 너무 많은 나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집에서 쉬고 있으니 교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고 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교사였다고 하면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에 지금 현재 교사가 아니라는 이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때로는 교사가 너무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었고 지금 가장 그리운 것이 학교생활이다. 항상 늦게 퇴근하는 내게 교장 선생님은 라꾸라꾸 침대를 하나 사다 놓아야겠다고 하셨고 동료 선생님들은 학교생활 말고 다른 취미생활을 살리라고 할 만큼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겼다.

 

집에 돌아와서 우리 아그들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다시 본다. 졸업할 때 영상으로 만들어서 선물로 주려고 생각 중이다. 나는 모든 학생들을 대할 때 똑 같이 대한다. 그래서 특별히 내게 총애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없을 것이다. 30명의 학생들 모두에게 생일선물과 편지를 주었고 꾸중을 할 때도 언제나 단체로 꾸중을 했다. 다만 내 진심이 전달될 수 있다면 그 뿐이다. ‘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했지만 그래도 못다 준 것 같은- 그러기에 잊을 수 없는-

 

좀 더 학생들에게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고 그 당시에 따뜻한 말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단체 생활이기에 교칙을 지켜야 하기에 가끔은 언어의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었는데 혹시나 상처로 남았을까 봐 염려된다. 1번부터 30번까지 문자를 보내야겠다. 내 사랑의 표시를 날려야겠다. 그리운 우리 아그들 알라븅븅~

(2011. 5. 200자 원고지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