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수필 / 젊은 날의 연가

몽당연필^^ 2012. 2. 10. 18:16

 

    젊은 날의 연가 

 

 

      

 


 바람이 바람을 몰고 와 여름 끝에 내린다.

보랏빛과 흰빛의 도라지꽃이 꿈처럼 하늘대고 있다.                                                                                  

볕은 따갑지만 바람에서 꿀밤 냄새를 느낀다. 성급한 마음일까?

‘출발하라.

머물러 있지 말고 항상 출발하라.‘

 

 문득 살아있고 싶었다. 모든 피상적인 것의 껍데기를 벗어나 꿈틀대며 살아있고 싶었다.

포착하고 유지하고 길들이고 습관화하는 그런 고정관념을 탈피해서 달아나 보고 싶었다.

아무 것이나 붙들고 나의 목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뫼로소나 라스꼬리니꼬프에게 연민 따위나 느끼며 이상과 현실을 혼동하고 도무지 출구를 찾지 못해 암흑만을 긁어대던 그런 날들의 연속, 그 날도 행사처럼 유서를 갈아 끼워 놓고서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을 하러 나섰다.

좁은 사각의 공간에서 보낸 혼자만의 여름이 네 번씩인가 지나갔을 게다.

그 여름동안 내게 닿는 소리는 복숭아봉지 싸는 신문지 사각이는 소리뿐이었다.

 

 낯설었다.

시멘바닥이 낯설었고, 고층건물이 낯설었고, 얼굴이 하얀 도회의 아이들이 도무지 낯설었다.

쎄시봉, 셀부르, 카네기, 무랑루즈... 뜻도 모르는 이국적인 단어의 간판들,

길가에 버려진 물건들, 음식들, 소리들, 생각들...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불안감, 떠밀리는 것 같은 소외감에 백화점 에스카레이트로 몇 번씩 상승을 시도해야 했다. 아무래도 숫자 표시를 잘못 적어 넣었을 것 같은 허늘한 블라우스 하나 값이 날 어지럽게 만들었다.

 

 걸었다.

지하도 입구에 물건처럼 엎드리고 있는 꾀죄죄한 소년에게 처음으로 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던져주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지금 내게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맞은편 레코드사에서 그 뭐라든가 하는 그룹의 와장창한 연주가 아스팔트 위를 빠르게 구르고 있었다.

발이 맞춰지는 것 같은 어색함에 반 박자씩 느린 이상한 걸음을 걸었다.

오랜만에 신은 굽 높은 구두가 영 거추장스럽고 불편했지만 벗어버릴 만큼의 만용은 갖고 있질 못했다.

 

 길들여지겠지.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에 침 뱉어 갈 방향이라도 정할까?

뻐근해진 다리를 끌고 다다른 곳, 다른 나라 사람들의 유행가가 괴성으로 탄성으로 속삭임으로 흘러나오는 음악다방 쿠션 좋은 의자에 털썩 눌러 앉았다.

결국은 사각의 어두컴컴한 공간, 이 아이러니컬한 진실된 허무.

동전 열개를 다 축냈으나 역시 혼자, 방황하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던가?

그리고 난 서서히 외로워져 갔다. 그 외로움은 참 포근했다.

 

 어항 속 이상하게 생긴 열대어 한 마리가 슬쩍 곁눈질하며 날 바라보더니 내가 이상한지 돌집 속으로 숨어버린다. 두 마리의 빨간 열대어가 뽀르륵 물방울을 내며 두 입을 쫑긋이 마주댄다.

가슴에 ‘아르바이트’ 라고 써 붙인 내 또래 아가씨의 어설픈 손놀림, 불편한 친절,

보리차를 두어 모금 마시고 우유를 한 컵 마셨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답답했다.

Adamo의 지난여름의 왈츠, 여름이 가고 있는데...

쪼다, 머저리, 팔푼이...

문득 책갈피 속에 갈아 끼우고 나온 유서(?)가 생각났다.

'-끊임없는 동경의 영원한 대상은 언제나 불가능일 뿐일까?'

죽고 싶어 죽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한 톨의 웃음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학생이고 싶었다.

출구를 향해, 출구를 찾기 위해 들어 온 대학이라는 곳, 무얼 배웠는지 왜 다니고 있는지 확고한 목표도 없이 나태한 생활 속에 한 학년이 지나고 또 한 학기가 지나가 버렸다. 오랜 갈망이었지만 순간적인 반항으로 시작된 내 대학 생활, 순리를 배반한 사치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내겐.

목표의식이 뚜렷치 않으니 분류니 목록이니 도무지 흥미가 있을 리 없었다.

엄마가 보고 싶고 아버지가 보고 싶고, 뛰쳐나온 내 작은 사각의 공간이 그리웠고, 과수원 한 모퉁이 도라지꽃이 눈에 아른댈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대구역 대합실로 나가 긴 의자에 앉아있는 그런 저런 사람들의 흙 묻은 고무신만 멍하니 보고 있다가 돌아오곤 했었다.

 

 교수님의 열띤 강의도 내 노트엔 언제나 여백으로 남고, 아직 과(科)친구들 이름도 머릿속에 여백으로 남는데 방학이라고 했다. 성적표의 무게가 그렇게도 무겁게 느껴지던 날, 백 원짜리 야쿠르트 하나 손에 쥐어 주시며 돈 걱정일랑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시던 아버지 생각에 목구멍이 심하게 부어올랐다.

책상 서랍에 모셔둔 우등상이라 이름 지어진 내 몇 푼어치 자존심의 잔재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입술을 깨물며 한 움큼의 붉은 웃음을 뱉어내야만 했고.

 

 현란하게 명멸하는 사이키델릭 조명아래 러브보이와 벅스피즈의 시끄러운 음악이 천정으로 벽모서리로 온통 부딪히며 심한 발악을 하고 있었다.

출구를 찾기 위해, 살아있음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아니 어쩜 젊음을 기만하기 위해 광란하고 있는 무리들.

그 속에서 난생 처음 정신없이 비벼댄 디스코 한 자락-

난 피아노 건반 한번 두드리지 못했고 그 흔한 캠핑 한번 떠날 수 없었다.

도토리 껍질 같은 글라스 한번 들어 올린 적 없었고...

 

 부끄럽게도 난 그것을 ‘절망’ 하고 있었다. 그 시간 책과 씨름하고 있을 장학생 친구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 시간 피곤한 몸을 가누며 종일 빛 하나 들지 않는 뒷방에서 미싱틀을 돌리고 있을 친구를 생각해 내지 못하고서.

뜨거운 자책과 뼈아픈 부끄러움이 엄습해 왔다.

무수한 흔들림 속에서 용케도 벽에 붙어서 인광을 내고 있는 전자시계의 숫자판이 무섭도록 빨리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전자오락실이라는 못마땅한 공해실에서 미사일 공격과 두더지 때려잡기로 어이없는 화풀이를 했다.

곳곳마다 너무 많다. 나와 동류의 젊은 인간들이. 빌건데 정신은 샘물처럼 맑고 칼날처럼 명징하길.

 

 좁은 사각의 손바닥 만한 창틀을 통해 새어나오는 별 하나 붙들고 여러 겹 쭈그리고 앉아 난 지금 무얼 논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나는 참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 하나 없다. 또한 등록금에 해당할 만한 아무런 전문지식 하나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질 않다. 생활의 반 이상을 잠으로 현실을 거부하며 보내면서도 하루 세끼를 꼬박 목청으로 우겨 넣고, 나는 다만 내게 안겨진 소외감과 쏟아지는 정(情)의 중량감으로 비틀거렸던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다시 오지 못할 학창시절, 우리가 늘상 찾던 교정의 ‘그 벤취’에 앉아 난 무엇을 부끄럽지 않게 얘기 할 수 있을까? 문득 어느 방황의 날에 발 닿았던 맹아학교 학생들의 축구시합이 떠오른다.

힘껏 내민 발에 공이 닿지 않아도 좌절하지 않고 또다시 시도를 하던-

 

 가슴이 뜨겁다.

학생이 아니어서 고민하고 학생이어서 고민했던 터무니없었던 날들,

‘젊음이라는 자체가 하나의 결점’ 이라던 영국 속담처럼 모색의 과정에서 저지른 하나의 잘못이리라.

훗날 이것이 ‘내 젊은 날의 연가’로 남을 수 있었으면...

시행착오의 연속인 문교정책에 희생되어 얼굴 핼쑥해진 친구 생각이 난다.

그래도 난 얼마나 행복한 돈키호테냐는 미련한 자위를 잠깐 해 본다.

기껏 가죽벨트나 반바지, 퍼머넌트 따위의 바람을 몰고 다니면서 젊음을 남용하는 친구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적당히 알면서도 언제나 공부에 전념하는 친구들, 생활의 현장을 몸소 실천해서 등록금 보태내는 친구들께 정말이지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맘이다.

 

 안단테 칸타빌레가 듣고 싶다.

런데 옆방에서 울리는 마이클 잭슨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내 영역을 침범하고 말았다.

좋다. 다 좋다.

맘이 약간 虛해 오긴 하지만.

단 하나, ‘공부 잘 하는’ 은 못 되더라도 ‘공부하는’ 학생은 되어야지.

바람이 분다. 잊었던 옛 얘기처럼.

포도 알에 맺혔던 이슬이 바람 따라 가버리고 어느덧 햇빛이 하이얀 포말로 부숴지는 아침.

 

 살아있다. 난.

결국은 출발점-

또 다시 유서를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거다.

젊음은 과연 메타모르포즈의 과정인가 보다. (1980년대 초 <교지> 게재. 200자 원고지 2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