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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눈빛으로- 블로그, 소통의 공간인가?

몽당연필^^ 2012. 2. 25. 13:42

눈빛으로-

(블로그, 소통의 공간인가?)

 

 

 

 

        

         군중 속의 고독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소통의 공간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주부들이 방 안에서도 세상과의 소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텔레비전이 유일하게 소통의 공간이던 것이 인터넷이라는 쌍방향성의 소통공간이 생긴 것이다. 세상의 이야기에 내 의견을 반영할 수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그들과 소통을 할 수 있으며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동호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을 보며 이야기를 해야지만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고 눈을 통해 진실성을 파악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눈을 보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자기의 속마음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익명성이나 문자는 조금 더 용감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서 참여의 공간 확대나 기회의 균등에서는 아주 좋은 것이며

정보 공유에도 더 없이 유익한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이라는 신기한 물건이 생겨나서 세상의 모든 일이 정말 손바닥 안에 있다. 지금 이 시간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게 되는 이른바 프라이버시의 종말 시대가 왔다. 글자를 쓰고 읽는 것을 싫어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머지않아 글자가 필요 없게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 필요 없게 된 시대가 되었다.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고 곁에 있어도 말로 하지 않고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눈을 보지 않고 마음을 읽는데도 정말 마음이 통할까? 말에 익숙하지 않아서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얼굴을 맞대고 손을 맞잡고 가슴을 부딪쳐야 마음을, 감정을 읽을 수 있을 텐데 모든 것은 문자 안에 다 들어 있다. 문자로 소통하는 세상, 그래서 오해도 많아진다. 아무리 표현을 잘 해도 이모티콘이 있어도 문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문자로 의사를 표현하다 보니 요즘은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 많다.

블로그 역시 문자로 소통하는 공간이기에 개인의 일상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보여주기 식 삶’의 단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편집해서 올리기 때문에 온전한 자기의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은 착각할 때가 많다. 어느 한 단편만 보게 되므로 실제 삶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걸 본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카메라가 좋고 기술 또한 좋아서 실제보다 훨씬 더 사물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할 수도 있고 보이기 싫은 부분은 잘라 버릴 수도 있다. 저작권 보호가 강화되긴 했지만 출처를 밝히지 않은 타인의 글들이 자신의 글처럼 올라와 있는 경우도 있다. 매일 뭔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굳이 보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올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급기야는 조회수에 연연하게 되고 블로그 중독까지 생기게 된다고 한다. 소통의 공간인 블로그가 오히려 주위사람들과 대화 단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첫째 목적은 소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순수하게 개인 일기장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대부분은 '로빈슨 크루소'나 영화 '케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처럼 무인도에서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앵무새나 배구공과 말을 하는 것처럼 어떤 소통을 원하는 경우일 것이다. 또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것을 잘한다.’ ‘나는 외롭다.’ ‘나는 행복하다.’ 등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며 정보 공유의 목적도 있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읽고 나와 생각이 비슷한 누군가가 댓글을 달아주고 공감해 준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받기도 할 것이다. 나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터넷 문화의 장점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개인 블로그는 나의 생각을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각각의 블로그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 성향이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한다. 자기의 삶 중에서 어느 부분을 가장 보여주고 싶은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블로그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바쁘다.

모두가 바쁜 일상에서 나의 또 다른 면이나 마음 속 깊이 있는 말들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할 수는 없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과 생활하는 사회인이거나, 혼자서 생활하는 사람이거나 소통이 없다면 누구나 고립되고 외롭기 마련이다. 마주 앉아 오래 대화를 할 시간이 없고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바쁘다’는 말을 덧붙여야 문장이 완성된다. 실제로 미국의 루우즈벨트 대통령이 어느 날 출근길에 ‘어젯밤 내가 할머니를 죽였어요.’ 라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인사로만 들었지 말의 뜻은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체홉의 <비탄>에 나오는 주인공의 외로움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그 슬픔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결국 말(馬)에게 하소연을 하고 만다.

 

 인터넷 문화로 인한 소통의 공간이 확대되고 소통의 폭이 넓어졌지만 결국 컴퓨터 앞에 혼자 있는 공간이다.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어도 어디선가 누군가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블로그는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안이 되는 곳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내 말을 말(馬)에게 하는 것처럼 컴퓨터에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공감을 하게 되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블로그 역시 이웃에 사는 친구한테처럼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차피 많은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다 읽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림이 아닌 긴 글을 읽을 시간이 없는 바쁜 현대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때론 완전 동문서답하는 댓글도 있다. 나를 알리고 싶고 내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상대방 말을 들어줄 시간이 없다. 소통의 시대지만 진정한 소통이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두가 자기의 할 말은 잘 하고 있지만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실의에 빠진 어느 청년이 블로그에 올린 유서를 보고 위치 추적을 해서 직접 달려가 목숨을 구한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루우즈벨트 대통령의 말에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았던 경우처럼 건성으로 내용을 귀담아 듣지 않고 읽어보지 않고 그냥 인사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비록 건성으로 보내는 문자일지언정 따뜻한 말 한마디는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다. 그 글이 쌓여서 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사람과 사람의 정이라는 것은 몸과 몸이 부딪칠 때 현실이 된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그 부분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 어려울 때, 눈빛만 봐도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문자를 보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눈빛,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닐까? 기계가 아닌, 사람을 바라보고 싶다. 말도 문자도 필요 없는 조용하고 정다운 눈빛, 따스한 체온으로 소통할 수 있길 원한다면 시대를 역행하는 것일까?

 (2012. 2. 24. 200자 원고지 18.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