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수필 / 한 잎의 女子

몽당연필^^ 2012. 2. 2. 15:20

                                                    한 잎의 女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같은 여자, 슬픔같은 여자, 병신같은 여자, 시집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대학 다닐 때 문예부장이 나에게 이런 시를 편지로 보내왔다.

나는 쬐그만 여자는 맞지만 외모나 행동이 그다지 여성답지 못했으므로 이런 시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나를 이렇게 특별한 여자로 보아주다니. 그러고 보니 비슷한 점도 몇 가지 있는 것 같긴 했다.

‘나를 좋아하나보다’라고 착각을 했다.

그 당시 이 시가 오규원의 시라는 것을 모르고 문예부장이 나를 보고 직접 쓴 시인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문예부장과 결혼을 할까 라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부터 정말 이런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주위에서는 늘 아들처럼 행동해 주길 바랐지만 난 '여자 아닌 것이 없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지금도 보기와는 다르게(꼭 이 말을 쓴다) 여성스러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는 여자인 것이 좋다. 다음 생에서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남자가 하는 일을 나는 절대 다 할 수가 없다.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완전 흥분할 일이지만 남자들을 존경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가 하는 일이 너무 많고 힘든 것 같다.

그래서 한 남자에게 사랑받으며 여자가 할 일을 잘 하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다.

당연히 인격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평등해야 되지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해야 되는 일을 불평해 본 적 없이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고 여자인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 난 여자를 버리고 왔다.

 

 열세 살 겨울 붉은 꽃이 피던 날, 내가 처음으로 여자가 되던 날,

이제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두려웠지만 여자로서 나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내 나이 오십 하고도 또 몇 개의 성상, 사십년이 넘게 여자임을 확인하게 해 준 나의 여자-

마흔이 넘던 어느 날부터 한 달에 한번 씩 내가 여자임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이제 내가 여자를 간직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지만 집요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여자-

십년 이상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버리지 않고 있었던 여자-

보름 전 병원에서 나는 그 여자를 보내고 왔다.

이제 나는 여자인 것이 없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솜털, 맑음, 순결, 시집, 자유...

아무 것도 없다.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만 남아 있다.

 

 슬펐다. 너무.

보름을 꼼짝 않고 누워서 그 동안 여자로서 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도 집요하게 여자이길 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한 남자를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

나는 아직도 사랑을 꿈꾸고 있는가? 그것을 위해 나는 여자이길 원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거기에 충실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내가 여자이어서 남다르게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책임회피만 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여성의 권리를 찾아주고 보호해 준 페미니스트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여자에 연연해하지 말자.

나는 이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온전한 나일뿐이다.

 

 한 잎의 女子여! 이제는 가라!

                                 (2012.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