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명상의 세계
-「이영숙 작품전」을 보고-
<이영숙 전>은 서양화임에도 불구하고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듯한 동양적인 정서가 짙게 자리하고 있다. 한지의 색상과 가장 가까운 색이라 할 수 있는 황색을 주조로 한 색감에서 한국의 토속적 정감이 묻어난다. 소재 또한 연꽃이나 부처(신선), 학, 난, 다기, 원…등 동양의 정신주의에 기초한 선사상(禪思想)에서 추출된 무위자연의 道를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나무'를 보면 얼핏 산불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 싱싱한 나무의 존재를 잃어버린 시커먼 형상, 자기를 태움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의 진정성을 깨닫게 한다. 달과 해로 연상되는 둥근 원의 이미지와 이미 소사한 시커먼 나무 밑둥치에서 생명의 잎 하나 돋아나고 있다. 암흑색과 대비되는 희망적인 황색은 밑둥치의 잎사귀가 아니었더라면 검은 나무를 뒤덮는 불의 이미지로 남을 뻔 했다. 절망과 희망을 대립시켜 준 단순한 색상과 단순한 구성 위에 하얀 희망의 메시지 하나 걸려 있다. 둥근 원과 잎사귀는 자연의 질서나 생명체의 유동성을 미시적으로 조명한 것으로 생명현상의 신비감을 전달해 준다. 원(해와 달)의 순환 속에서 충직한 삶을 살아온 나무, 시커멓게 타 버린 검은 각질을 뚫고 새로 움트는 어린 잎사귀는 바로 자연의 이치에서 우주를 보고 존재의 근원성을 깨닫게 한다.‘자연과 인간은 하나다'라는 만물의 이치를 말해 주며 무위자연의 노장사상을 깨닫게 해 준다.
제목이 없는 또 다른 작품을 보면 부처(신선)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정신적인 휴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명상적이며 각박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게 해 준다. 검은 원과 흰 원, 검은 난초, 검은 부처, 그 위에 온통 흰색으로 뿌옇게 덧칠한 그림, 신기루 속 저 멀리 도달할 수 없는 심오한 경지를 나타낸 것일까? 그의 작품은 우리의 시각을 사유의 심연으로 이끈다. 달 일수도 있고 해 일수도 있는 순환 원리, 아니면 단순한 구성 위에 공간감을 살리기 위한 이야기 거리 일수도 있는 흑과 백의 둥근 원은 시각으로 인지 되지 않는 무한한 상상의 공간 또는 우주공간을 연상케 한다. 거기에 던져지는 실체로서의 난이나 부처의 형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무한 공간을 떠다님으로써 자칫 상실하기 쉬운 현실 인식의 이정표가 아닐까?
<이영숙 전>은 동양적인 사상에서 추출된 이미지들의 도입으로 시각화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의 표면화는 시각적인 이해를 돕는 데는 가능하나 미적 감정에 대한 호소력은 약하다. 어디서 봄직한, 또는 알고 있는 내용들의 이미지화일 뿐이기에 새로운 감동이나 신선한 충격은 없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휴식은 얻을 수 있었다. 깊은 자기 성찰, 스스로의 사유 및 사색으로 닿지 않는 새로운 표현에 필요한 예술가의 영감을 기대해 본다. 제목 없는 작품은 감상자의 상상력을 증가 시켜 주지만 작가가 의도한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2000. 5 )
생명의 나무
2000.5.22~27. 갤러리 예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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