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삶의 진리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관람하고-
문화 예술 회관에서 대구 시립극단 제 4회 정기 공연으로 셰익스피어 작, 김태석 연출의 <베니스의 상인>을 관람했다. 셰익스피어가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원숙기에 집필한 너무나 잘 알려진 고전 희극 <베니스의 상인>은 내용을 다 알고 보는 것이니만큼 내용의 흐름이나 메시지 전달보다 그야말로 연극적인 면에서 세밀히 볼 수 있었다. 예상 외로 관객이 많아서 향토 연극에 대한 관심과 셰익스피어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관객들이 시간을 꼭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막이 오른 여섯 시가 넘었는데도 관객들이 계속 들어와서 시작 부분이 어떻게 되었는지, 배우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1막 1장이 지나가 버렸다. 우선 무대 설정이나 대리석 기둥, 문, 이국적인 건물이 장중한 느낌을 주었다. 연극 관람 전부터 무대의상에 대해 철저한 고증을 거쳐 거액을 들여서 만든 화려한 작품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여배우들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색들은 한국적인 느낌이 들었고 포셔의 드레스는 조명이 비칠 때 오히려 화려하게 보이지 않았다. 인물 설정에 있어서 몇 가지 느낀 점은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대체로 너무 작고 정확한 대사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셔의 마지막 재판장에서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전달이 잘 되었고 버샤니오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연약한 여성에서 오히려 그를 구해 주는 강한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이 극에서 주인공 역할인 샤일록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많았다. 샤일록은 인물 성격의 복잡성을 띠고 있다. 이방인이면서 비정한 유태교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은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악랄한 인물형과, 어리석고 무식한 인물형 등으로 겉과 속이 다른 다양한 모습을 내포하고 있다. 샤일록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다양한 이념과 가치가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극에서 샤일록(이송희 粉)은 사뭇 동정심을 유발하는 분위기였다. 젊고 활기차고 매력적인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서 가장 나이 많고 마르고 목소리 자체가 부드럽고 악랄하지 않아서일까?
그의 대사 중에서 딸은 죽어도 좋지만 보석만이라도 관속에 있었으면 하는 대목이 있는데, 내용은 비정해도 샤일록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배우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까? 조금은 덜 희극적이고, 동정심을 유발하지 않는 연기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연출자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샤일록만을 매도할 수 없는 오늘날의 다양한 시각으로 반유태주의적 편견의 사고에서 벗어나서,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 이 극을 해석한 것인지도 모른다. 연출자는 말한다. ‘정의와 진실은 악과 거짓을 물리친다.' 라는 삶의 진리를 담아 놓았다고.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고전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당연히 샤일록을 미워했었다. 고리대금업자는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샤일록의 대화 중 ‘유태인은 눈이 없단 말이오? 손도 없고 오장육부도, 분노도 아무 것도 없단 말이요?’라고 한 부분에서 이교도에 대한 모욕과 욕설에 대한 복수의 동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동정심이 생겼다. 이 극이 탄생된 지 400여 년이 된 지금 현대사회는 급속도로 다양한 변화를 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작품이 쓰이던 그 시대에도 셰익스피어는 인간에 대한 객관성을 제시했는지도 모른다.
누가 누구를 죄인이라고 할 것인가? 호화로운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부와 미인과 명예를 얻기 위해 친구를 담보로 돈을 빌린 버샤니오, 분명한 약속을 했으면서도 이행하지 못한 안토니오, 안토니오의 위약서를 무마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제시하는 포셔, 아버지를 버리고 사랑에 빠져서 애인과 하루 저녁에 80더키트를 써 버리는 제시카, 그들이 과연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했다. 윤리성보다도 합리성, 편리성, 향락성을 추구하는 이 삭막한 현대사회에서 그래도 꼭 필요한 ‘인간의 情’이라는 것이 없으면 결국은 멸망한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극을 희극으로 받아들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어릿광대 란슬러트의 과장된 몸짓 '양심과 마귀의 대화' 표현 연기가 돋보였다. 제 5막의 시작, 포셔가 등장하기 전 로렌조와 제시카가 보여주는 서정적인 야경 장면은 포셔와 네리사가 남성 변장을 벗고 우아한 여성 복장으로 갈아입도록 해주기 위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이 야경 장면을 좀 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무대장치로 바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가장 극적인 부분인 재판장에서의 판결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적인 긴장감이 덜 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대본을 미리 알고 보는 연극의 결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때,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 구조에 의해 집중하게 되고 감동이나 교훈이 전달 될 수도 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
이 극을 희극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설정한 쌍쌍이 포옹을 하는 장면 중에서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푼 안토니오만 혼자서 쓸쓸해 보이는 웃음을 짓는다. 그를 보며 과연 웃을 수 있을 것인가? 물질적 가치에 따라야 하는 상인이면서 정신적 가치를 옹호함으로써 가치관의 갈등에 빠져 있던 그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버사니오를 지원한다. 결국 포셔를 통한 이상적 가치가 실현되지만 왠지 유쾌한 웃음을 보낼 수만은 없었다. 제목이 <베니스의 상인>이니 만큼 안토니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시간 20분 동안의 긴 공연을 관람하면서, 중간 중간에 약간의 실수도 보였고 마지막 공연이어서인지 배우들이 힘이 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 긴 대사들을 외우고 연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배우들의 노력과 열정에 전율이 왔다. 공연 관람의 가장 큰 목적은 또 다른 인생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과 공연을 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배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 보기 위해 사람들은 극장에 가고 연극(배우)은 관객의 변신을 위한 빈 그릇이 될 각오를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까지 지켜보고 그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힘껏 보내고 나서 일어섰으면 한다. 연극의 발전을 위해서는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져야만 할 것이다. (2000. 4. 9.)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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