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책, 책
향기는, 오랫동안 기억된다.
언제나 그리움으로 설렘으로 다가온다. 아침마다 콧노래를 부르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밤새 안녕한지 살며시 열쇠를 꽂고 문을 열면 확 밀려드는 냄새, 아니 확 안기는 향기, 코를 벌름거리며 잘 있었냐고 물으면 여전히 그 자리서 나를 반겨주는 책, 책, 책들이다. 도서관에 있는 만 팔천여 권의 책들은, 냄새가 아닌 향기로 다가와 항상 나를 설레게 하고 그리움마저 불러일으킨다.
가장 오랜 기간 변함없이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도 책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글자를 배우고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곁엔 책이 있었으니까. 물론 언제나 책을 읽었다는 것은 아니다. 식탁에도 화장실에도 가방에도 언제나 책 한 권은 있어야 맘이 여유로워지고 뭔가를 준비한 것만 같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항상 먼저 눈 마주치는 책, 각각의 표정을 담은 눈에 익은 활자들이 곧게 허리 펴고 그 자리 잘 있는지 살펴본다. 쓰러져 있으면 일으키고 자리에 없으면 찾아본다. 책꽂이의 책들도 어쩜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장래 희망에는 항상 책과 관련되는 직업을 적었다. 일단 책을 만드는 출판사나 잡지사의 ‘편집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 책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던 ‘사서’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앞에는 세종서점이라는 작은 서점이 있었다. ‘서점 주인’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 서점 주인이 서울말을 쓰는 잘 생긴 총각인지 아저씨였는지 그랬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그때 받은 용돈은 거의 다 책 사는 데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도 그 당시에 샀던 책들이 내 책장에 꽂혀있다. 사람도 그렇겠지만 책도 버려지지 않고 다시 읽힐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 어떤 책이 발간되었는지를 보면 시대상황도 알 수 있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샀는지를 보면 그 당시 나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 베스트셀러가 뭔지 몰랐던 중학교 때 산 책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책이었다. 사실 이해를 온전히 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읍내 중학교로 입학을 해서 어쩜 외톨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사춘기 그 시절, 책과 함께 있으면 책이 내 숨소리를 들어주는 것 같았고 주인공들의 고민이 내 고민과 같아서 해답을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고 시절 3년간은 연애소설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입시를 위해서 고전이나 인문 도서를 필독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아버지는 중 3 겨울 방학때 시골에 모처럼 들어온 외판원에게 송아지 판 돈으로 문고판 한국문학전집 백 권을 사 주셨다. 그 당시 부잣집에는 금박 박힌 전집이나 백과사전이 자랑스럽게 꽂혀있었다. 오죽 책을 갖고 싶었으면 처음으로 취업한 곳이 '국민서관'이란 출판사의 외판원이었을까? 손바닥만한 문고판 책은 꽂아두는 책에서 읽는 책으로 독서계의 혁명을 일으킨 것이라고 광고했다. 광고대로 우리 반 친구들이 수업 시간에 몰래 감추어서 돌려본 책이 되었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서부터 신상웅의 ‘히포크라테스 흉상’까지 그야말로 한국현대문학이 망라되어 있었는데 사실 여고생이 읽기에는 부적절한 내용도 있었고 어려운 내용도 있었다. 온통 책에 빠져서 책 중독이 된 탓에 성적이 곤두박질친 그런 날들이 지금도 꿈에 나타난다. 실제로는 남학생을 만나지도 못하면서 책 속의 주인공들과 사랑을 했었는지 모른다. 그 후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읽게 된 어떤 책들도 그때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읽은 책에 비해 해박하지도 않고 이뤄놓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어쩜 내가 읽은 책이 바로 지금의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덧 정년이 다가왔다. 모든 것을 조금씩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두었던 책들까지 꺼내 놓으니 좁은 집이 온통 책, 책, 책이다. 어느 시인은 책 한 권이 논 한 마지기와 같다고도 했다. 물론 물꼬로 들어가 한 마지기 다 채웠을 때를 말한다. 내가 읽은 책은 몇 마지기 논일까? 어느 날, 아들이 저 책들을 다 읽었냐고 물었다. ‘읽을 것이다’라면서 쌓아둔 것이 더 많다. 책꽂이에서 묵정 논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1일 1개 버리기’라는 책을 읽고 있으면서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겐 아직 ‘이용 가치 상실’인 책이 없는 셈이다.
오래된 책 냄새에 얼굴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더 깊이 맡으려고 킁킁댄다. 퀴퀴한 냄새? 오래된 종이 냄새? 시골집 사랑방 냄새였던가? 아버지 냄새였던가? 이 냄새는, 이 향기는 그리움이다. 소중하게 깊이 넣어 둔 상자에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시고 만드신 시집이나 교재가 들어있다.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이 책들을 아버지는 나에게 물려주셨다. 한지로 싸여있는 소중한 종이를 풀어보니 거기엔 ‘인동 장씨 가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칙명이 들어있다. 그렇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길이 묻어있는 한지로 만든 이 책들은 그야말로 나의 가보(家寶)이다.
집집마다 책이 없는 집은 없을 것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책의 영향을 받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전자책이나 휴대폰으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지만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길 때의 그 촉감은 다음 페이지에 이어지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해 주고 작가와의 혹은 주인공과의 접촉처럼 달콤하지 않았던가? 어떨 때는 활자만이 아닌, 내용만이 아닌 그 책 자체가 보고 싶을 때도 있다. 서른이 넘은 작은 아이는 지금도 화장실에 갈 때면 어릴 때 읽던 이원복의 ‘사랑의 교실’을 가지고 간다. 그 책을 들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고 어린 시절의 그 감동들이 살아난다고 한다.
가끔 집에 놀러 오는 지인들은 천장까지 닿아 있는 쓸데없는 책들을 제발 좀 버리라고 한다. 오래된 책을 버리지 않는다고 나무라면 섭섭하다. 저 책 어딘가에는 내 방황의 시절이 있고, 내 열정의 시절이 있다. 그가 수천 번도 더 만졌을 영어사전은 그의 손때가 묻어있고 속표지에는 다시 보지 못할 그의, 멋진 필체가 남아 있다. 내가 이 길을 가도록 일깨워 준 저 책들은, 흔들릴 때, 힘들 때 한마디씩 말을 걸며 나를 지탱하게 했던 친구들이다. 우리가 외로운 것은 평생 옆에 두고 읽을 책이 없어서 그렇다고도 한다. 다시 읽을 수 있는 책 하나쯤 곁에 있다면 인생이 외롭지 않을 수 있다.
남보다 잘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래도 밥 먹고 사는 건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방에 앉아서 ‘지중해 해변’ 을 거닐며 음악을 읽고 건축을 읽을 수 있다. ‘까뮈’를 만나고 ‘오르한 파묵’을 만난다. ‘소크라테스’나 ‘노자’와 대화할 수 있으며 옷장 속, 음식 속의 인문학 강의까지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화가 날 때는 책 한 권을 골라서 정독을 하면 어느새 내가 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고 정돈된 활자들이 마음을 정돈시킨다. 즉흥적인 감정들을 다스릴 수 없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시간만큼 마음이 정제되어 간다.
도서관에 새 책이 들어왔다. 사백 권 정도의 새 책을 정리하면서 맘이 설렌다. 용돈 아껴서 서점에 책을 사러 가면 언제 저 많은 책들을 다 만져볼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었는데 지금 한꺼번에 사백 권의 새 책을 내가 다 만지고 있다. 한 번씩은 표지를 넘겨본다. 내 책인 듯 콧노래가 나오고 췍, 췍, 췍... 오예! 책 제목으로 랩을 읊조린다. 요즘은 책 표지가 산뜻하고 예쁜 것이 많다. 책도 예뻐야 인기가 있나? 마음이 가는 책을 따로 옆에 쌓아 본다. 쌓아둔 책만큼 지식이 쌓이는 것 같고 배부르다. 물론 독서는 알량한 지식 쌓기가 아니라 균형 잡기임을 잊지 않고 있다.
내 노년의 꿈은 넓은 창문이 있는 서가에 앉아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돋보기를 쓰면 어지러워서 오래 책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머리 허연 할머니가 우아하게 책을 보는 장면만을 생각하며 멋있다고 생각했다. 몇 해 전, 꿈이 이루어졌다. 희망대로 넓은 창문이 있는 도서관에서 많은 책들과 함께하고 있다. 쉬는 시간마다 쪼르르 달려와서 책을 읽는 학생들 모습은 너무 사랑스럽다. 열정적이었던 독서토론 팀 ‘다독다독’반 학생들은 아직도 책을, 사람을 다독이고 있을 것이다. 먼 훗날 책의 내용과 함께 우리들이 함께 했던 장면 하나쯤 생각났으면 좋겠다.
어느 먼 나라 푸른 나무였을 이 종이가 어느 작가의 온 마음을 담은 책이 되어서 우리에게 왔다. 책 한 권을 만드는 데는 보통 3미터 길이의 나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책은 숲이다. 책을 잡으면 싹이 자라고 여름 가을을 거쳐 무수한 책나무 열매가 되어 터지듯이 우리가 잡은 책 한 권이 열매 되어 터졌으면 좋겠다. 책, 책, 책......
오늘도 나는 책의 숲에서 무수한 나무들을 만난다. 오랫동안 기억될 이 책 향기 속에서 그리움을 낚는다. 책은 사람이고 세상이고 우주다. 어느 날 책이 나에게로 왔듯이 나도 누군가의 책이 되고 싶다. <끝> 202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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