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오늘이 3월 15일이다. 1986년 3월 15일 그 날로부터 34년이 지났다. 34년이란 세월이 이렇게도 빨리 지나갔구나. 늘 바쁜 생활 속에서 잊고 지낸 적도 있고 별 의미 없이 보냈는데 요즘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로 시간이 많다 보니 뒤돌아보게 된다.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고 아침에 작은아들에게서 톡이 왔다. 축하 할 일인가? 내 삶이 축복받을 만한 삶인가? 뭘 축하 하냐고 했는데 축하할 일인 건 맞는 것 같다. 그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소중한 두 아들이 이 세상에 없었을 테니. 만약에 그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며 또 다른 자식이 있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지금까지 혼자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고...
몇 번 만나지 않고 결혼을 했고 결혼을 해서 바로 주말 부부가 되었기에 요즘 젊은이들처럼 연애감정을 느껴보지도 못했고 여행 한번 간 적도 없었다. 언니들의 가르침(?)으로 신혼여행도 그의 형편을 배려해서 경주로 갔는데 멀미를 심하게 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결혼 34주년이라서 그 날을 떠올려보니 식장에서 울음을 참느라 계속 굳은 표정으로 있었고 그 와중에 아버지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이쁘다는 말을 하신 것, 그것만 떠오른다. 딸 여섯 중 막내로 자라서 그런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와 함께 살아야 할 즐거움 보다 부모님과 헤어져야만 하는 슬픔이 앞섰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홀로 자수성가한 그도 여러 가지 회한으로 슬픔을 삼키느라 감정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구나! 그 날 그의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모님보다 그를 좋아하면 안 되는 것 같은 죄스러운 마음이 늘 앞섰다. 아직 불안했고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고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다. 올해는 지금 목련꽃도 피고 매화꽃도 피었지만 그 해 3월 15일은 나뭇잎도 돋아나지 않았고 꽃 하나 피지 않은 아주 황량한 이른 봄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엄마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해 그와 함께 신혼집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자취방에 그대로 있었고 일주일에 한번 씩 우리 집으로 오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바로 임신을 한 탓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신혼의 달콤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살면서 두 아이가 태어났고 4년 만에 드디어 그가 대구로 전근을 오게 되어 주말부부가 아닌 친정집에서 함께 살며 출퇴근하게 되었다.
예쁜 신혼집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식탁엔 꽃을 꽂고 앞치마 두르고 된장찌게를 끓이는 신부, 그런 아내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긴 했지만 나이 많으신 부모님을 두고 우리끼리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그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결혼해서 단 둘이 오순도순 사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론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서른을 앞둔 나이였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만 생각했을까? 그러고 보니 부모를 일찍 여읜 그도 처갓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랬다. 결혼 전부터 내가 그런 조건을 내세웠다. 우린 서로 그런 생활을 원했던 것이다.
부모님은 연세가 많으니 살 날이 많지 않다고 우리와 함께 할 날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출퇴근이 힘들겠지만 아이들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살자고 했다. 부모님 연세 쉰 하나, 마흔 다섯에 늦게 둔 막내딸이었으니 결혼하는 것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여섯 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으니 부모님도 좋아하셨고 우리도 좋아했다. 행복했었다. 시골 생활이었지만 아이들 잘 자라고 부모님 건강하고 힘 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늘 결혼 34주년에 지난날을 되새겨 보니 그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오래 되어서 잊어버렸나? 되새김질 하지 않아서 날아가 버렸나?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에 몸서리 칠까봐 행복한 장면이 없었다고 세뇌시키고 있었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며 사무치는 그리움을 풀어놓을 수도 있는데 없다. 없다고 한다.
우리 그 때 결혼 5주년에 무엇을 했을까? 그 5주년이 우리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해였다는 것을 알기나 했을까? 앞으로 살 날이 많다고, 앞으로 선물도 하고 기념일도 챙기고 아이들 크면 집도 사고 그렇게 노후까지 행복하게 살자고 했었겠지. 당연히 그렇게 살 줄 알았겠지. 그래서 34주년 이 때쯤엔 손잡고 어디 해외여행이라도 함께 떠날 수 있을 줄 알았겠지. 다시 내 나이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다면, 그와 함께 신혼 방 한 칸 얻어서 식탁에 꽃 꽂아두고 예쁜 앞치마 두르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놓고 그가 퇴근을 하면 쪼르륵 달려가서 그의 목에 매달려 입맞춤 하는 그런 생활을 딱 한 달만이라도 해보고 싶다. 내 나이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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