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겨울비

몽당연필^^ 2024. 1. 7. 14:17

 

겨울비

 

겨울비는 휴식이다.

어렴풋한 새벽잠 속에서 들리는 듯 마는 듯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느낀다. 화들짝 놀라는 마음 아닌 편안한 마음, 무표정으로 창밖을 본다. 봄비나 가을비가 올 때처럼 약속부터 잡는 게 아니라 약속을 깨기 위해 핑계를 생각한다. 휴대폰을 잠시 꺼 두고 오랜만의 휴식을 겨울비와 함께 누려보고 싶어진다. 먼 어느 날 고향 집 골방에서 보던, 혹은 듣던 겨울 나그네, 겨울 연가 그런 것들을 불러내어 함께 하고 싶어진다. 눈이 되지 못해서 행여 원망이라도 들을까 봐 소리 죽인 겨울비다. 눈이 아니어서 오히려 호들갑 떨지 않게 되고, 차갑지만 더 차가운 날보다는 포근한 날이라고 여유를 부리며 포근하고 따스한 것들을 불러내고 싶다.

 

비 온 뒤 바깥이 얼어붙지 않을까? 집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지낼까? 떨고 있는 것들이 많을 텐데... 이렇게 따뜻한 방에 누워있어도 되는 걸까? 편안히 맞이하는 겨울비지만 괜히 바깥의 모든 것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도 한다. 비가 와서 하루 일을 하지 못하게 될 현실일 수도 있지만 비가 오면 언제나 휴식 같다. , 여름, 가을, 겨울을 돌아보게 하고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한다. 겨울비는 시각이나 청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다가온다. 방문을 꽁꽁 닫고도 겨울비는 마음속까지 차갑게 내린다는 걸 알 수 있다. 한 해의 끝에서 시린 겨울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있을 테고 온몸으로 시린 추억을 반추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겨울에 떠난, 혹은 떠날 것들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방안의 온기를 내어주고 싶다.

 

겨울비 속에는 바흐나 구스타프 말러의 경건한 음악이 깔려 있다. 겨울비 오는 날은 누구를 그리워하는 사무치는 마음을 지나서 오히려 고독과 한 몸이 된다. 문득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 속의 한 사람이 되게도 한다. 떨어져서 차가운 땅바닥으로 소멸될지도 모르는 군중 속의 고립, 그래서 경건하게 만들고 무릎 꿇고 기도하게 만든다.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 귀가 얼어서 떨어질 것 같은 날도 있지만  이번 겨울비는 의외로 폭풍우처럼 휘몰아치지 않는다. 휘몰아치는 마음을 잠재워 준다. 평정심을 찾도록 차갑고 냉정하게 식혀주기도 한다. 젖은 마음, 잊은 마음, 어쩌면 이순(耳順) 넘어서 느끼는 그저 그런 감정들처럼 차분히 내리는지도 모른다. 추억도 낡고 녹스는 것일까? 겨울비 내리던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추억들은 오래된 그대로 배경이 되어서 비로소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다.

 

가을비 우산 속이 아닌 겨울비는 우산을 접고 창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창안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비다.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나 옥수수 잎에 내리던 빗소리가 아니다. 겨울비는 맞으면서 반기는 것이 아니라 피하면서 느낀다. 창밖 우산 속 연인들도 어깨동무 느린 걸음이 아니라 발걸음이 빨라진다. 겨울비 내리는 날은 따뜻한 커피보다 뜨끈한 국물이 생각난다. 후루룩 소리 나면 어때? 어쩌면 그동안 얼어붙은 입이 풀릴 수도 있는 시간이다. 난롯불에 언 볼이 발그레해지면 차가운 손 한번 잡아주고 싶어진다. 날씨가 추우니 감기 조심하라고, 길이 미끄러울 테니 운전 조심하라고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 안부 묻게 되고 오순도순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군불 땐 구들목, 따뜻한 밥 한그릇 식지 않도록 묻어 둔 그 구들목 이불 밑이 참 그립다.

 

겨울비는 지난 계절에 일어났던 변화무상한 감정들을 차분하게 정리하게 한다. 너의 탓이 아니라 나의 탓이라고 마음 넓은 척 한번 바꿔 생각해보게도 한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눈 오면 눈 오는 대로 그냥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좀 더 추웠으면 눈이 내려서 좋았을 텐데 하다가도 덜 추워서 다행이라고 겨울비가 고맙기도 하다. 계절의 끝, 한해의 끝에서 내리는 겨울비는 흘린 눈물을 닦아 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웅크리면서 나의 마음을 보듬는다. 겨울비는 미사여구를 쓰지 않게 한다. 오감을 자극하기보다는 이성을 깨운다. 이 비 그치고 나면 바로 새싹 돋는 건 아니지만 떨고 있는 나목들에게 말없이 툭, 차갑게 툭 어쩌면 먼 훗날을 위해 꼭 필요한 물 한 모금, 격려의 눈빛으 건네는지도 모른다.

 

겨울비는 무겁게 차갑게 회색으로 내리지만 가볍고 따뜻한 생각을 가지고 온다. 묵은해와 새해가 함께 있는 이 겨울에 누구를 얼리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도 조용히 나를 다독인다.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비를 추적 추적이라 말하지 말자. 그냥, 말없이 표정 없이 야단스럽지 않게 가만히 내릴 뿐이다. 모든 무거운 이야기 겨울 연가로 엮어서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 낮잠으로 풀어낼까? 겨울비는 마음의 휴식 맞다. 보낼 건 보내고 잊을 건 잊고 버릴 건 버리고... 살다 보면 안다고 했던가? 동지를 지나 조금씩 두터워지는 햇살처럼 겨울비 내린 뒤 도무지 모를 갈증도 조금씩 해소되지 않을까? 지금 이 나이에 내리는 겨울비는 아무것도 동경하지 않는 편안함으로 바라볼 수 있다. 머리는 차갑게 등은 따스하게 겨울비 소리 자장가 삼아 낮잠이나 청해 볼까?

(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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