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벌써 65세? 아직 65세?

몽당연필^^ 2023. 11. 24. 10:49

벌써 65? 아직 65?

 

                                 - 강명희 소설 ‘65를 읽고-

 

 

 친구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갔더니 초를 몇 개 드릴까요? 묻는다. 선뜻 대답을 못했다. 올해 65세다. 만 나이가 아닌 우리 나이로지만 너무 많아서 대충 초 몇 개만 달라고 했다. 며칠 전 나도 65세 생일을 보냈다. 아직 나는 손주를 보지 않았기에 할머니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카톡 프로필에 자신의 사진이 아닌 손주들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면 할머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건 아줌마 스타일이야. 이건 할머니 같아. 옷을 고르거나 머리를 손질할 때도 아직 아가씨인 것처럼 꼭 한 번쯤은 그렇게 말한다. 이것이 문제다. 몸과 마음이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 알지 못하는, 문득 서글퍼지는 60대 나이다.

 

60세가 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언제 65세가 되었단 말인가? 정확히 작년 2월 호적으로 만 62세에 정년 퇴임을 했다. 오랜 기간 근무했지만 기간제 교사였기에 연금이 없는 정년 퇴임이다. 아직 미혼인 두 아들이 있기에 일정 금액의 수입이 없으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다. 일 년을 놀고 있으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아직 마냥 놀 수만은 없는 나이고 체력이 되지만 재취업을 하기엔 어느 곳이나 나이가 걸린다. 평생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디 특별히 이력서를 낼 만한 곳도 없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김밥 마는 일도 50세 미만이라고 하며,  자격증이 있는데 꽃집에 꽃꽂이 하는 일도 50세 미만이라고 한다. 김밥도 못 말고 꽃도 못 꽂을 체력은 아닌데 60이 넘었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일 년을 놀면서 내가 일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자격의 연수를 듣고 일을 하려고 하지만 해보지 않은 일이라 망설여진다. 일자리를 찾다가 갑자기 화가 나기도 한다. 여태껏 열심히 일했는데 또 이렇게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맘 졸여야 하나?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강명희 작가의 ‘65세’라는 책 제목에 눈이 갔다. 서른 잔치가 끝났다고 할 때도, 불혹의 나이를 넘어설 때도, 회갑 여행을 갈 때도 사실 나이를 그렇게 실감하지는 못했다. 30대에 먼저 간 남편을 원망할 틈도 없었고 혼자서 두 아들을 키우며 공부하고 직장 구하고 또 직장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렇게 정년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내 나이가 65세가 된 것이다. 어쩜 내가 공감대를 느낄 수 있거나 나를 대변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책 표지에 정겨운 민들레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왜 거꾸로 그려져 있지? 하면서 그림 설명을 찾았으나 표지 그림에 대한 설명은 없고 표지 작가 이름만 조그맣게 있었다. 출판사 이름이 도화(道化)이다. 복사꽃이란 뜻이 아니고 고정화된 사고의 틀을 해체한다는 뜻이라고... 그렇구나! 라고 이해하며 ‘작가의 말’을 읽었다. 국어 교사로 근무했으며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공통분모가 있어서 더욱 더 관심이 갔다. 첫 번째 실린 작품이 ‘첫추위’ 였다. 65세의 나이로 취업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나는 사실 공감이 가는 내용은 아니었다. 우리 나이에 아직도 부끄러운 단어인 ‘섹스’라는 단어가 문학적 비유 없이 사용되어 멈칫했다. 첫추위 같았던 스무 살의 청춘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65세 내 나이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목차 세 번째의 작품 ‘65세’를 읽었다. 우리 나이에 빠질 수 없는 요양원 이야기가 나온다. 앞으로 우리들이 거쳐야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친구들은 이 나이에 취업이 비교적 쉬운 요양보호사가 되기 위해 다시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한 경우가 더러 있다. 야간 근무를 하면 일당이 더 많기 때문에 아예 야근 근무를 하는 친구도 있다. 집에서 남편과 둘이 마주 보고 있어 봐야 잔소리만 하게 되고 어차피 각 방을 사용하는 터라 오히려 편하다고 하는 친구도 있다. 이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하지만 과연 재미있기만 할까? 집도 있고 먹고 살만 하지만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고 며느리나 손주들 기념일이라도 챙겨주고 싶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들 집이라도 마련해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같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은 미세먼지 나쁨 수준의 날씨 같아 숨쉬기가 버겁다’고 한 65세 주인공의 말에 공감이 갔다. 나는 늦게 태어난 막내였기에 부모님과의 사이가 각별했고 오랜기간 함께 살았다. 치매를 4년 앓고 86세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92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세월, 부모님이 안 계시면 못 살 것 같았지만 돌아가실 무렵에는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늦게 둔 막내를 애지중지 키워주신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신다는(보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세상 떠나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서도 뭔가 정리가 된 것 같았고 답답한 미세먼지가 걷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제 우리도 머지않아 자식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될 것이며 내가 쓰던 모든 것을 버린 채 요양원으로 들어가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정년 퇴임을 하고 이제 좀 쉬어도 될 나이에 주인공은 정년 퇴임의 홀가분함도 즐기지 못하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단신으로 월남한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기보다 자신이 조금은 더 모시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65세 우리 세대의 마음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열 다섯이나 어린 새어머니를 맞아 재산을 다 빼앗기고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였지만 원망보다는 자식이니까 당연히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먼저 요양원에 모시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고 죄인이 되는 것만 같다. 65세 주인공도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노인이 되었지만 아직은 아버지를 모셔야 하고, 한창 돈이 들어갈 자식 생각에 자신의 연금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자신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일 날, 아들 며느리가 온다고 해도 손수 미역국을 끓여야 하고 뒤처리도 다 해야 하지만 그래도 기다려지는 건 부모 마음이다. 아들이 보낸 커다란 택배에 내심 무슨 선물인지 설렜지만 손녀가 사용할 아기 식탁이었다. 일 년에 서너 번 데리고 오는 손녀가 밥 먹을 때 불편할까 봐 아들이 택배로 보낸 것이다. 여기서 그냥 아들이 보내준 대로 손녀가 올 때 사용하면 될 것을 65세 주인공은 일을 벌이고 만다. 아들의 돈이 아까워서 친구가 쓰던 아기 식탁을 분리수거대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단신으로 월남해서 먹고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아버지는 분리수거대에서 좀 쓸만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집으로 가지고 오셨다. 주인공은 그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아버지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아들에게 전화해서 조심스럽게 택배로 보낸 아기 탁자를 반품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더니 자기 딸에게 남이 쓰던 식탁을 쓰게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당연히 며느리의 대답이라고 느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친구들 사이에도 더러 있는 일이다. 아들 며느리가 늘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말하니 부모로서 미안하기도 하고 멀쩡한 물건이 아깝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기우다. 우리들 보다는 자식 세대가 육아도 잘하고 잘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커피 한 잔 값 아낄 때 좋은 호텔에서 숙박하고 맛있는 것 먹었다고 인증샷 찍어 올리고 하는데 부모들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 한 자식들에게 너무 주려고만 하는 것도 간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65세 되면 연금 받아서 여행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면서 여유롭게 살 줄 알았는데 그건 일부 계층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건강에도 좋고 당연하지만 돈을 모아서 자식에게 주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의 재롱에 더 없는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노인으로서의 육아란 사실 육체적으로 무척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식들이 부탁하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자식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다. 아직은 부모님을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돌보고 있지만 아들 며느리들은 우리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일을 했음에도 자식에게 당당하지 못한 우리 세대, 왜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지 서글퍼진다.

 

작가는 소설 ‘65세’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유와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노인이 될 것 같지 않았는데 꿈도 희망도 멈춰버린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소설 속 마지막 문장이 여운을 남긴다. 평생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할머니인 이 자리를 퇴직할 것이다. 이제 나만을 위해 살 것이다.  -거실 소파에 나와 혼자 앉았다. 이렇게 노인이 되었구나.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초라한 청춘이 생각났다. 남들처럼 해주지 못한 자식에게 미안해서 늘 죄인이 된 것 같은 처지가 서러웠다. 어느 날 할머니가 사라졌듯이 아버지가 사라지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 그리고 어느 날 나도 사라지겠지. 그러나 한편에서 속삭인다. 이제 너도 노인이야. 남은 삶을 멋지게 꾸려봐! 마지막 노년을 노을처럼 아름답게 불살라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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