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어제 그리고 오늘 / 신경끄기의 기술

몽당연필^^ 2018. 6. 3. 20:17

어제 그리고 오늘 / 신경끄기의 기술

 

 

낮잠 뒤의 이 고요한 침잠, 눈을 떴지만 한참 멍한 상태, 이승과의 이별인 듯 깊이도 알 수 없이 스르륵 추락하는, 놓쳐 버린, 꺼져 버린... 모르겠다.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 *** ***

 

 

 

 

 

1.

어제 대구에 있는 넷째 언니 생신이었다. 언제나 곁에서 엄마같이 챙겨주는 언니다. 조카네 집에서 모두 모여 웃고 떠들다가 늦어서 함께 밤을 새고 아침에 헤어졌다. 언니 집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조카들과는 형제나 다름없고 나를 위해주고 따른다. 그들도 부모가 되었고 이제 언니 연세 일흔여덟 할머니가 되었다. 힘들 때마다 서로를 보듬었던 가족, 그래도 조카들이 잘 자라서 엄마를 잘 챙겨주고 며느리가 집에서 생신상까지 차려주니 다행이다. 아침에 집에 와서 깊은 낮잠을 자고 나니 시끄럽던 선거유세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다.

 

 

 

*** *** ***

 

2.

어제의 떠들썩함은 가고 견딜 수 없는 이 고요, 이 허전함, 어제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휴대폰을 들었다. 연락처를 본다.877명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지금 통화를 하면 받을 수 있는 번호를 본다. 877명 중에 딱히 통화를 누를 번호가 없다. 그냥 유월이라고 문자 몇 군데 보냈더니 통화 한 군데 오고 문자 답 오고 안 온 곳도 있고 꽃 필 때 만나자고 했는데 이제 방학 때 만나자고 한다. 877명은 나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어떻게 나의 폰에 저장되어 있을까? 그 많은 인연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모두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에 불과할까? 석 달 전 문자를 했던 하나의 전화번호에 잠시 머문다. 다음에 만나자는 문자를 수도 없이 했었구나. 그러나 이제 그다음마저도 없어졌구나. 우린 언제나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카톡 프로필에 신경끄기의 기술책 읽는 중이라고... 우리가 주고받았던 카톡 대화는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우리 같이 근무하며 같이 도시락 먹던 때가 언제였던가? 그때 우린 지금 이 날을 예견이나 했을까? 중 고 동창으로 같은 학교에 근무했었던 친구, 바쁘다는 핑계로 늘 다음에 만나자는 거짓말을 했구나. 네가 간 지 한 달 보름이 되었는데 난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수 많은 번호들, 이름들... 알아서 행복했던, 몰라도 좋았을 그 이름들... 어느 날 전화를 하려고 번호를 펼쳐보면 그렇게 신경끄기의 기술 책을 읽는 중이라고 어쩜 영원히 통화 할 수 없는 번호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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