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독서 / 욕망해도 괜찮아 (김두식)

몽당연필^^ 2013. 1. 4. 16:05

 저녁 10시 반에 자고 아침, 아니 새벽 5시 반에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방학을 해도 그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어제 일찍 잤더니 오늘은 새벽 4시 반에 잠이 깼다. 읽다 만 책들을 들추어 본다.

아직 <철학자들의 식물도감> 읽고 있는 중이라 여름에 읽다 남은 <욕망해도 괜찮아>

다시 펴서 다 읽었다. 어려운 책 읽다가 집중 안 되면 재밌는 책 번갈아 가면서 읽는 습관이 있다.

 

 나이 들면 사라질 줄 알았던 성욕이 그렇지 않다는 걸 여러 군데서 듣고 보게 되는데 시간이 많으니

나 역시 그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솔직히 젊었을 때는 오히려 그것 아니라도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모든 일에 자신만만하고 오만해서 남자가 없어도 외롭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듦에 따라 오늘이 지나면

내 생애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애틋함과 어쩜 욕망 자체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더욱 더 사람을, 이성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성에 관한 이야기 자체를

잘 하지 않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예사롭게 말한다. 잘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요즘은 공감되며 같이 농담도 한다.

 

              

 

 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 전에는 똥아저씨 이야기도 있고 별로 재미없어서 읽다가 말았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욕망을 억누르면서 살아온 세대인지라 공감되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6장, 색의 인간, 계의 인간을 보며 나의 젊은 날과 비슷했구나 생각했다. 학창시절엔 ‘모범생’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모님은 남의 눈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우리 딸 여섯을 모두 다 중매해서 시집보냈다는 걸 자랑으로 여기실 정도였다.

지금도 동창회에 가면 모르는 남학생이 많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답답하다. '얌전하고 공부 좀 한다고 남학생들과 가까이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실 내 안의 나는 언제나 탈선을 꿈꾸고 있으면서 이런 눈들 때문에 나는 언제나 선을 넘지 못했다.

 ‘모범생’이란 말 안에 갇혀서 아무 것도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 말투나 쓰는 글들도 약간의 불량? 혹은 반항이 묻어 있을 수 있다. 이러다 보니 나도 어느 것이 나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저자가 부모님께 나이키 신발을 사달라고 하지 못했다는 글을 읽고 나 또한 그랬었다는 생각을 하며 공감했다.

보이지 않는 ‘계’에 얽매어 있던 나를 떠올려 보았다. 대입 체력장 할 때 러닝슈즈를 신지 않았던 유일한 학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여학교에서는 가정 시간에 병풍이나 액자용 수예를 많이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수예품이 없다.

재료비가 비싸서 엄마에게 말 못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내 친구의 돈을 받아 열심히 수를 놓아서 그 친구에게 줘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했던 것은 아닌데 엄마에게 돈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고작 그런 것이었다. 그랬을 정도이니 연애를 하면 부모님께 큰 불효를 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첫사랑의 기억이 없다.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고 있다.

그래서 내 방식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내 잣대로 나쁘게 평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몸이다>(226쪽) 정말 결국 문제는 몸일까? 생각해 본다.

-저자의 친구는 가끔 커피숍에 갈 때마다 주변에 앉은 남녀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고 했다.

‘커피숍에 앉아 있는 남녀들의 성기 사이의 거리가 1미터를 넘지 않는구나.

그런데 참 용케도 그걸 감추고 살고 있구나.

사람의 인생이란 게 결국은 그 거리를 마이너스 10센티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구나!-

아, 이런 위대한 발견, 그런 것 같다. 그 마이너스 10센티에 인생이 좌우되는...ㅋㅋㅋ

 

-우리가 욕망을 이기려고 몸을 그렇게 홀대하지만 막상 결정적인 순간

우리 삶을 가르는 기준은 마음이 아니라 몸일 때가 많다.

예컨대 이성교제에서 ‘선을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 를 정하는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 몸의 결합이다.

말이야 어떠하든 마지막에 남는 실존적 고민은 ‘잤냐 아니냐’ 인 것이다.

흔히 사람 사이의 소통수단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말과 글과 몸이다.

모두들 말과 글의 소통이 살의 소통보다 중요하고 고상하다고 믿는 분위기지만,

실상 인생을 흔드는 것은 살의 소통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일탈자와 사냥꾼으로 만드는 근본 원인도 몸에 대한 억압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 한번 가진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말과 글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소통수단의 하나가 살이다.

말이나 글의 소통이 조심스럽고 중요한 것처럼 살의 소통도 중요하다.

그 이상의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물론 순결을 지키겠다는 결심도 가치가 있다.

다만 그런 선택이 타인을 심판하고 감시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자신이 선택한 길만이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선 하나를 놓고 결국은 넘지 못한다.

 

-정신적 사랑, 육체적 사랑, 깨진 사랑, 이루어진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

그렇지 못한 사랑, 무거운 사랑, 가벼운 사랑, 뜨거운 사랑, 차가운 사랑, 그 이름이야 어떻든 사랑은 아름다운 거다.

살의 소통을 즐기되 남이 어떻게 즐기는지에 대해서는 레이더를 꺼야 한다.

남의 욕망을 엿보는데 쏟는 에너지를 줄이는 대신에 내 욕망을 관찰하고 탐닉하는 모험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개된 건강성과 은밀한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몸의 문화이다.

몸을 누르는 사회에서는 여성도 남성도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색과 계(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고민하게 마련이다.

정말 욕망해도 괜찮을까?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스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렇다. 욕망을 하되 그 욕망을 잘 다스리면 될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는데... 특히 '계'에 묶여있는 어른들은...

그렇다면 옆길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도로아미타불!

 

*하루 2, 30명 밖에 방문 안하는 내 블로그에 이상한 아이디가 많아서

조회해 봤더니 어제 쓴 <야한 소설?> 검색자가 400명이 넘는다는 데 놀랐다.

이렇게 야한 것에 관심이 많은 현대사회에 도덕적인 이야기 해봤자 듣지 않는다는 것-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혼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