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일기 / 오늘 같은 밤에는- (2012.12.21.눈)

몽당연필^^ 2012. 12. 22. 00:42

 오늘 같은 밤에는

 

    

 

두 번째 함박눈 내린 날이다. 눈이 내림으로 해서 내가 상승하는 기분 때문일까? 눈 오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부웅 몸이 가벼워지면서 진공상태가 되는 것 같다. 아스라한 기억이 하이얀 현기증과 함께 몰려오면서 눈앞이 흐릿해진다. 가슴에서 날갯죽지 양쪽으로 저릿한 통증이 박힌다. 첫눈 오는 날의 기억도 없고 첫사랑의 기억도 없는데, 어쩜 있지도 않는 기억이 아니, 잊고 있었던 기억이 이리도 나를 흔들리게 만드는지... 멀미...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을 끼어 맞추다가 추락!

 

오늘 고교동창 송년회 모임이 있는 날이다. 사실상 남녀공학은 아니었지만 같은 재단이라 남학생들과 같이 모임을 갖는다. 일 년에 서너 번 공식 모임이 있지만 참석할 기회가 잘 없다.공식적으로 고향 친구를, 남자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모임이다. 오늘은 참석하려고 마음을 먹고 아침부터 빨간 미니 원피스를 입고 머리 손질을 하고 다른 때 보다 멋을 내고 출근했다.그런데 같이 가려고 한 친구가 일이 생겼다고 한다.

 

오후부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 내린다고 휴대폰이 울릴 리 없고 내가 먼저 전화를 해 볼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언제나처럼 배려란 이름으로 그냥 집어넣었다. 그래도 오늘은 약속이 있으니 덜 허전한 것 아니냐고 스스로 위로했다. 부서별 모임 약속이 있어서 일찍 나왔더니 눈이 와서 길 미끄럽다고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저녁 약속 시간이 어중간하게 되어 버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친구가 팥죽 먹으러 오라고 했다. 모임을 핑계 삼아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모임에 갈까 말까를 수십 번도 넘게 번복하다가 결국은 일단 집으로 왔다. 이 때 가지 않으면 친구들 볼 날이 잘 없기 때문에 가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집에 들어오니 그만 가기 싫어졌다. 호텔 연회실에서 뷔페로 저녁 먹고 끼리끼리 잡담하고 술 마시고 밴드 불러 노래하고 춤추고 그러다가 집에 오고... 늘 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디든 음주가무가 있어야 흥이 나는 법이지만 열정이 식었는지 하여튼 이것이 재미있어야 하는데 내키지가 않는다.

 

노래도 춤도 영 못하는 건 아닌데 하고 싶지가 않다. 그런 곳에 가면 어울려 놀아야 하는데 그것이 재미없으니 모임에 가기 싫은지도 모른다. 아참, 나는 여태껏 누구와 블루스(?)를 한 번도 춰 본 적이 없다. 전문 춤꾼이 아니니 물론 노래방에서 함께 하는 가벼운 춤을 말한다.그래서 본의 아니게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도 하고 사실 그것이 불편하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촌스럽다고, 아니 재수 없다고 할런지도 모른다. 이건 내숭일 수도 있는데 참 우습게도 아무것도 아닌 이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놀려고 작정을 하면 분위기에 따라서 머리 풀어헤치고 잘 놀 수도 있긴 한데...

 

마음에 없어도 웃어야 하고 떠들어야 하고 싫어도 노래 부르고 춤추어야 한다. 물론 세상살이가 다 그러하지만 이런 모임에 갔다 오면 더 허전하고 피곤해지게 된다. 남들은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으니 별난 여자인건 분명하다. 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세수하고 혼자서 밥 먹고 이렇게 멍하니 있으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세상이 나를 저버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저버린다고 생각하자. 여럿이 있어서 좋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혼자 있어서 좋을 때가 있다. 내겐 오히려 이 외로움이 더 안온한 익숙함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마음에 없는 웃음 너무 많이 웃었으니 오늘같이 지천에 눈이 쌓인 밤에는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어 보는 것도 좋지 않으랴. 오늘 같은 밤에는 부치지 못할 기인 편지 한 장 눈물로 쓰는 것도 괜찮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