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방

독서 평설 / 밀턴의 실락원

몽당연필^^ 2012. 10. 31. 16:30

 

가이드 북 | 세계 명작을 찾아서

밀턴의 『실낙원』

권장 수업 시간 : 2교시(100분)

대상 꼭지 : 고교독서평설 11월호 「세계 명작을 찾아서」

참고 자료 : 존 밀턴 지음, 『실낙원·복낙원』(혜원 출판사)

               존 밀턴 지음, 『아레오파지티카』(나남 출판)

               한국 밀턴과 근세 영문학회(www.memes.or.kr)

학습 목표 : ① 밀턴의 정치적·사상적 견해가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며, 이는 그의 세계관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② ‘청교도 혁명’의 발단과 전개, 의의를 『실낙원』의 사상적 의의와 연관시켜 설명할 수 있다.

집필자 : 하남석_ 유레카 논술·구술 연구소 강사

 

들어가는 글

 

“진리와 거짓이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하십시오.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자신의 말처럼 평생을 진리와 자유를 위해 투쟁해 온 지식인이다. 문학적으로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와 더불어 ‘세계 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꼽힌다. 밀턴의 대표작 『실낙원』은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꼬임으로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구약 성서』의 이야기를 다룬 방대한 서사시다. 『다빈치 코드』로 유명한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이나, 영화로도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모은 톨킨(John R. R. Tolkien, 1892~1973)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담긴 메시지 역시 『실낙원』의 주제들과 무관하지 않다.

『반지의 제왕』을 예로 들어 보자면, 한때 선의 편이었으나 교만으로 인하여 선을 배반하고 자신의 영광을 유지하려 하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게 되는 ‘사루만’은 ‘사탄’과 비교할 수 있다. 한편 절대 반지를 찾아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 ‘프로도’는 낙원에서 추방되어 쓸쓸히 자신의 길을 가는 ‘아담’과 닮았고, ‘반지 원정대’라 불리는 프로도 일행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견주어 볼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반지의 제왕』과 『실낙원』은 그 주제와 캐릭터가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읽기 지루하고 어려운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피하지 말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주제와 캐릭터들을 최근의 영화나 문학 작품들과 연결시켜 이해해 본다면 고전 읽기가 훨씬 흥미로워질 것이다.

 

심화 자료

 

밀턴의 생애

존 밀턴은 1608년 런던의 전형적인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밀턴의 아버지는 공증업과 사채업으로 성공을 거둔 상당한 재력가이자 작곡가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여가를 보냈다고 한다. 음악을 자주 들려주고 학문을 권장한 아버지 덕분에 밀턴은 소년 시절부터 라틴 어, 그리스 어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익혔고, 프랑스 어와 히브리 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뒷날 밀턴은 그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나를 문학 연구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나의 지식욕은 지칠 줄을 몰랐고, 열두 살 뒤로는 한밤중이 되기 전에 서재를 떠나거나 잠자리에 드는 일이 없었다.” 그가 50대에 실명(失明)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늦게까지 책을 보던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밀턴은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62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 근엄하고 성실했던 그는 외모가 곱상하고 행실이 단정하여 ‘케임브리지의 숙녀(Cambridge Lady)’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뒤 1629년 3월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632년 7월에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7년을 보내는 동안 밀턴은,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작가의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1638년 문학 수업을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하지만 그 이듬해 고국의 내란 소식을 듣고 “조국의 동포들이 나라 안에서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데, 홀로 편안히 외유(外遊)를 즐기면서 지적 교양을 쌓는다는 건 참으로 면목 없는 일이다.”라면서 서둘러 귀국했다. 내란이 가라앉은 뒤에는 런던에 거주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자에 가까운 시인으로 생활하면서 자유를 위한 논쟁적인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밀턴은 종교 개혁과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글들을 썼다. 그리고 네 차례나 「이혼론」을 발표하여 그 당시 종교적인 이유로 금지되어 있던 이혼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밀턴 자신의 쓰라린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1642년, 열렬한 공화주의자인 그는 서른넷의 나이로 왕당파 지주 집안의 딸인 열일곱 살의 메리 파웰과 결혼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와 성격, 집안 배경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달 뒤 친정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밀턴은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혼은 본인의 의사로 자유롭게 결정할 양심의 문제이지, 법이나 교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며, 성격이 맞지 않는 부부가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자기를 기만하는 죄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으나, 보수적이었던 그 당시 영국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왕당파와 장로파는 밀턴을 ‘도덕을 파괴하고 사회와 가정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위험 분자’라는 이유로 집중 공격하기도 했다.

밀턴의 산문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1644년에 발표한 「아레오파지티카」다. 의회가 출판 허가제를 공표하자, 이를 철회시키기 위하여 쓴 이 글은 사전 검열에 대한 항의로서 고의로 검열과 등록을 거치지 않은 채 팸플릿 형태로 출판되었다. 밀턴은 이 책에서 “나에게 자유를 달라.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알고, 자유롭게 말하며, 자유롭게 추론할 수 있는 자유를 다른 모든 자유 이상(以上)으로 달라.”고 부르짖었다. 이러한 주장은 비록 곧바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오늘날 「아레오파지티카」는 ‘언론 자유의 경전(經傳)’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밖에 왕당파를 비판하고 종교의 자유를 옹호한 밀턴의 산문들은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정부에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그는 크롬웰의 라틴 어 비서로 근무하면서 주로 외교 문서를 다루고 시민적 자유와 공화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글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지나치게 격무에 시달리는 바람에 1650년 왼쪽 눈이 실명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두 눈 모두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1658년 크롬웰이 세상을 떠나자 의회는 혼란에 빠졌고, 망명 길에 올라 유럽 각국을 전전하던 찰스 2세가 1660년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정이 복고되자 찰스 2세와 왕당파들은 크롬웰 일파에 대해 철저한 보복을 시작했다.

크롬웰의 비서로 일하던 밀턴에게도 체포령이 떨어졌고, 밀턴은 은둔 생활 끝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금당했다. 하지만 여러 지인(知人)들의 구명(救命) 운동, 그리고 시력을 잃은 작가는 더 이상 왕정(王政)에 해를 끼치기 어렵다는 왕당파의 판단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실명과 실각(失脚)으로 인한 고독과 실의(失意) 속에서 밀턴은 오히려 실명을 천명(天命)으로 여기고 평생의 대작인 『실낙원』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는 이 작품을 라틴 어가 아니라 영어로 썼다. 이는 단테가 라틴 어를 버리고 이탈리아 어로 『신곡』을 쓴 것과 같은 의도였다. 민중의 말이자 일생생활의 언어로 참된 기독교 정신을 국민들에게 알리겠다는 일념 아래 『실낙원』을 완성한 밀턴은 곧바로 『복낙원』과 『투사 삼손』의 집필에 들어갔다. 밀턴은 말년에 세 편의 대서사시를 완성하면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곤궁한 가정 형편과 건강 문제로 고생했으며, 딸들과의 갈등도 심했다고 한다. 그는 1674년 11월 8일 지병인 통풍으로 세상을 떠났고, 런던의 크리플 게이트에 있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 묻혔다.

 

밀턴의 자유론과 그 시대적 배경

밀턴의 일생과 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상은 자유 의지와 자유 선택에 관한 것이다. 밀턴은 이집트의 전제 군주인 ‘파라오’의 지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준 신의 은혜를 찬양한 시 두 편을 번역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 비탄과 치욕의 노예 상태에서 자신이 신의 선택된 전사임을 새삼 확신하게 되는 『투사 삼손』에 이르기까지, 밀턴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밀턴 스스로도 자신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자유’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평생에 걸쳐 종교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이혼의 자유, 군주의 독재와 주교의 탄압으로부터의 자유 등 그 당시 보수적인 영국 사회의 풍토 아래에서 요구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냈다. 그러므로 밀턴의 자유론은 격렬한 분쟁 속에서 종교적 자유에 목말라 하던 영국민의 모습이 반영된 시대적 산물이라 볼 수 있다.

밀턴에게서 자유 의지가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개인적인 신학(神學)에서 비롯된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자유라는 개념은 그 당시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 현안으로, 밀턴뿐 아니라 유럽 사람들에게도 매우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유럽은 이른바 ‘종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주도하는 종교 개혁이 일어난 이래 유럽에는 가톨릭의 부패와 탄압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해방 운동이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서 유럽 전역에 걸친 거대한 전쟁으로 발전했다. 마치 조선 시대에 불교에서 유교로 종교적 국시(國是)가 바뀐 경우처럼 종교 전쟁은 유럽 사람들에게 문화적·사회적으로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온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1562~1598)과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❶, 30년 전쟁(1618~1648)❷으로 대표되는 이 국제적인 전쟁에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영국, 스위스 등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정신적으로는 교황이 주도하고, 세속적으로는 황제가 주도하는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

그 대신 독일과 프랑스 등의 국가 권력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주권 국가들의 공동체라는 근대 유럽의 기본 구조가 확립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종교적 자유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종교적 자유에 대한 거센 요구는 영국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이는 ‘청교도 혁명’이라는 내란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당시 유럽 역사라는 큰 흐름에서 보면 영국의 청교도 혁명도 본질적으로는 종교 전쟁에 속한다.

청교도 혁명은 지금까지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내란’이라는 정치적 관점으로 인식되어 왔다. 한편 혁명이 일어난 뒤 영국이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그 정치 체제를 바꾼 점을 고려하면, 청교도 혁명은 시민적 자유와 근대적 입헌 정치가 시작되는 출발점으로서도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청교도 혁명은 근본적으로 매우 순수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소홀히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크롬웰이 가장 관심을 보였던 것도 정치적 개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자유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신의 도구로, 영국민을 신의 총아로 비유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게다가 청교도 혁명을 단순히 찰스 1세의 실정(失政)에 대한 정치적 반란으로 본다면 1642년 이후 영국 사회를 휘몰아쳤던 내란의 소용돌이에 담긴 힘과 열정을 설명하기가 힘들어진다. 소수파임에도 전쟁을 불사하게 만들고, 다수파에게도 내키지 않는 선택을 종용하도록 몰고 간 원동력은 바로 종교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청교도 혁명이 가져온 입헌 체제의 변화는 교회 통치 체제의 개혁과 서로 맞물려 있었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영국에서 종교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사회 세력이었고, 정치는 아직까지 독자적인 지배 세력으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영국의 청교도 혁명은 유럽 최초의 정치 혁명이기도 하지만, 유럽 종교 전쟁의 마지막 국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수업 활동

 

터 잡기

1. 밀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중심으로, 그 당시 유럽 사회의 정세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라는 걸출한 군주의 지휘 아래 16세기 말부터 왕 중심의 절대 왕정 체제를 갖추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차례로 왕위에 오르면서 절대주의가 강화되자, 의회는 이에 반발하여 왕에게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권리 청원」(1628)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듬해 찰스 1세는 이를 무시하고 의회를 해산한 뒤 의회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고,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채 전제 정치를 감행했다. 그 결과 영국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져 내란을 겪게 되었다.

의회파에는 청교도들이 많이 가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공화제와 그에 따른 보통 선거의 실시, 인민 주권과 기본적 인권의 보장 등을 주장했다. 내란 초기에는 의회파가 많이 밀리는 듯했으나, 크롬웰의 등장으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 결과 1640년부터 20년에 걸쳐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면서 공화제가 성립되었고, 찰스 1세는 1649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길잡이_ 밀턴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살았던 지식인이다. 그는 청교도 혁명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인간의 ‘자유’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학생들이 구체적인 작품을 읽기 전에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220쪽 참조】 그러나 조국이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는 소식에 밀턴은 그리스 여행 계획을 취소한 채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청교도 혁명과 공화제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는 보수적인 영국 국교회를 비판하며 성서 중심주의를 주장한 논문, 이혼의 정당성을 외친 논문, 검열 없는 출판의 자유를 주장한 「아레오파지티카」(1644) 외에, 「왕과 위정자의 재임」·「우상 파괴자」(1649), 1651년과 1654년 두 편으로 간행된 「영국 국민을 위해 변호하는 서(書)」처럼 찰스 1세의 처형과 공화제를 지지한 문서들을 남겼다.

이 같은 저술이 발표되자 밀턴의 이름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다. 그는 청교도 혁명에서 의회파의 승리를 이끈 크롬웰(O. Cromwell, 1599~1658)의 라틴 어 비서로서 공화제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온 힘을 쏟던 중, 1651년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뒤로는 딸과 조카들, 친구와 제자들, 유급 필기사들에게 받아 적게 하여 저술을 발표했다.

그러나 1660년, 살신성인에 가까운 그의 노력에도 왕정은 복고되고 말았다.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우상 파괴자」 등의 저서가 불태워지는 통에 목숨마저 위태로워졌으나,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탄원 덕분에 처형만은 면할 수 있었다.

 

※ 『실낙원』 평설에서 발췌한 지문들이다. 알맞은 단어로 괄호 안을 채우시오. (2~4)

 

2. 『실낙원』은 모두 1만여 행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대서사시다. 밀턴은 여기서 『구약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   ①   ) 이야기,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꼬임에 빠져 신과의 약속을 어긴 벌로 낙원에서 추방되는 이야기, 『신약 성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세계의 종말, 지옥의 풍경 등을 12권에 걸쳐 노래하고 있다.

1667년 처음 출판되었을 무렵에 『실낙원』은 열 편의 (   ②   )였다. 그러던 것이 밀턴이 사망하기 직전에 그가 재구성해 놓은 열두 편으로 다시 출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그는 이 작품의 원고를 겨우 5파운드에 팔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출판업자에게서 초판으로 찍은 1,300권이 다 팔리면 5파운드를 더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는데, 초판은 불과 1년 6개월 만에 다 팔려 나가 버렸다.

(219쪽 참조)    ① 천지 창조   ② 무운시                      

 

3. 한편 여호와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타락할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벌을 대신 받을 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자 여호와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나선다. 밀턴은 이를 통하여 인간 세계의 근원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여호와와 예수, 사탄의 무리와 인간을 등장시켜,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밝히려 한 것이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신은 인간에게 (  ①  )을/를 주었다.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든, 그 유혹을 꿋꿋이 견뎌 내든 그것은 인간의 (   ①   )에 달려 있으므로,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아담과 이브는 (   ①   )을/를 갖고 있었음에도 (   ②   )를 저지르고 말았고, 그 결과 인간은 신의 세계를 떠나서 이기심과 정욕에 따라 살아가게 되었고, 온갖 죄를 범하게 되었다.

(220쪽 참조)   ① 자유 의지   ② 원죄                

 

4. 무엇보다 이 작품은 ‘인류는 언젠가는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적 신념을 노래하고 있다. 아담이 미카엘이 들려준 구원의 예언에 위안을 받으며 낙원을 떠나는 마지막 부분은, 구원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준다. 밀턴은 젊어서부터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시를 써야 한다는 (   ①   )을/를 갖고 있었고, 서사시야말로 그에 알맞은 이상적인 문학 형태라 여겼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가 그리스 정신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로마 정신을, 단테의 『신곡』이 (   ②   )을/를 노래했듯이, 『실낙원』은 근대 (   ③   )의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실낙원』은 『성서』의 내용과 기독교 교리의 전달이라는 목적성만 지닌 종교 문학이 아니라,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빛나는 ‘영원한 고전’이다.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강조한 (   ③   )을/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그 당시 유럽의 정신세계를 집약한 근대 문화의 정점이자 인류 문화의 찬가로 길이 남을 것이다.

(220~221쪽 참조)   ① 소명 의식   ② 르네상스 정신    ③ 청교도 정신            

 

 

펼치기

1. 다음 제시문들을 읽고 인간의 본성관에 대하여 비교·정리해 보고, 자율성과 타율성이 인간 사회의 발전에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놓고 토론해 보자.

 

(가) 야훼는 성자(聖子)를 옆에 거느리고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지구의 인간계에 눈을 돌렸다.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는 행복한 고독에 잠겨 사랑을 한껏 누리며,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열매를 먹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사탄이 지쳐서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야훼는 ‘사탄의 희망은 성취될 것이고, 이것이 나의 깊은 생각’이라며 옆에 앉은 성자에게 말했다.

“독생자여, 나는 인간을 올바르게, 악의 유혹에 충분히 견딜 수 있게 만들었지만 타락하는 건 그의 자유다. 나는 모든 천사와 영(靈)을 그렇게 창조했으니 견딜 자는 견디고 타락할 자는 또한 자유로이 타락하리라.

자유롭지 않다면,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해야 하는 일만 나타날 테니, 진정한 충성, 변치 않는 믿음과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무조건 복종하기만 한다면 거기서 내가 무슨 기쁨을 얻겠느냐? 인간에게 의지와 이성이 무용지물이라면, 그건 내가 아니라 운명을 섬기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반역하는 것이니 내가 예견한다 해도 나의 예견은 그들의 타락에 영향을 주지 못해. 나는 그들을 자유롭게 창조했으니, 그들은 스스로 노예가 될 때까지 자유로울 거야.”

“그러나 인간이 한 번 실수한다고 해서 ‘인간 창조’의 대업을 그만두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인간은 아주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자비로 그들을 대하겠다. 기도도 있고, 회개도 있지. 내게 귀의해 오는 자는 구원해 줄 거야. 그러나 한번 지은 죄는 면할 길이 없어. 인간의 자손들에게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려질 것이니라. 금단의 열매를 먹은 죄를 징벌하기 위해서.”

 

(나) 곽낙타라는 사람은 나무를 심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는데 장안의 고관들과 부자들은 관상목이나 과실 나무를 심을 때 모두들 다투어 그를 불러다 나무를 심고 관리하게 했다. 낙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어도 죽는 일이 없고, 무성하며 일찍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나무를 심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솜씨를 엿보고 흉내 내어 보았지만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비법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무의 천성(天性)을 따라 그 본성(本性)을 잘 펼 수 있도록 할 뿐입니다. 나무의 본성을 본다면, 심을 때는 그 뿌리를 펴 주기를 바라고, 북돋기를 할 때는 고르게 하기를 바라며, 흙을 채울 때는 본래 것을 좋아하고, 다지기를 할 때는 단단하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해 놓은 다음에는 흔들어 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며 내버려두고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묘목을 심을 때는 자식을 돌보듯 하고 버려둘 때는 내버린 듯이 하면 그 천성이 온전해지고 본성은 다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고, 그것을 잘 자라고 무성하게 할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열매 맺기를 억제하고 억누르지만 않을 뿐이지 그것을 일찍 익게 하거나 번성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무를 심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뿌리는 겹쳐 심고 흙은 바꾸어 주며, 북돋기를 할 때는 너무 많이 하지 않으면 모자라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사랑하고 염려하기를 지나치게 한 나머지, 아침에 와서 살피고 저녁에 어루만지며 돌아갔다가는 다시 와서 살피곤 합니다. 심한 자는 그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서 나무가 말라죽지나 않았는지 시험해 보고, 그 뿌리를 흔들어 나무가 엉성하게 심어지지나 않았나 시험해 보니 나무의 본성이 날로 어긋나게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그것을 해롭게 하고, 염려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원수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저들이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질문을 한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의 방법을 관리(官吏)의 다스림에 적용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하니 곽낙타가 대답했다.

"나야 나무 심을 줄이나 알지 관리의 다스림은 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고향에서 보면 관리들이 명령을 번거롭게 하여 백성들을 염려해 주는 듯하지만, 끝내는 화를 끼치고 맙니다. 아침저녁으로 관리들이 와서는 소리치기를, '관청에서 여러분에게 명합니다. 밭 갈기를 서둘러서 빨리 곡식을 심고 부지런히 추수를 하시오, 빨리 실을 자아서 옷감을 짜시오.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개와 닭을 잘 기르시오.' 하면서 북을 쳐서 사람을 모으고 나무 막대를 두드려 사람을 부르니, 우리 같은 백성은 음식을 차려서 관리들을 대접하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우리의 삶을 번창하게 하며 우리의 본성을 평안하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벼슬아치의 다스림이 나의 직업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하겠지요."

질문을 한 사람이 말하기를,

"참 좋은 말입니다. 나는 나무 심는 법을 물었다가 사람을 기르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고는 그 일을 전하여 관리들을 위한 경계로 삼았다.

 

(다) 인간의 본성(本性)은 악하다. 착하다는 것은 인위(人爲)의 결과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여 그 본성을 따르면 남과 쟁탈을 하고 사양함이 없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여 그 본성을 따르면 남을 해치고 성실함과 신의가 없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소리와 색()을 좋아하는 욕망이 있어, 그 본성을 따르면 음란(淫亂)함이 생기고 예의가 없게 된다.

인간의 본성을 따르고 인간의 본정(本情)을 따르면 반드시 쟁탈하는 데서 출발하여 예의와 도리를 범하고 드디어 혼란에 귀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스승과 법률의 교화를 받아 예의로 인도한 다음에야 사양하는 마음이 생기고 예의에 맞게 되고 마침내 평화스럽게 된다. 이로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하며 그 착함은 위선임이 분명하다.

굽은 나무는 기준에 맞추어 바로잡은 뒤에야 반듯하게 되고, 잘 들지 않는 칼은 숫돌에 갈아야 예리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도 이처럼 악한 까닭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야 올바르게 되고, 예의를 배운 뒤에야 잘 다스려지게 된다. 사람에게 스승의 가르침이 없으면 치우쳐서 바르지 못하고, 예의를 배우지 못하면 도리에 어긋나고 난폭해져서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부터 지금까지 세상에서 선()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이치와 평화로운 다스림을 가리키고, 악()이라고 하는 것은 편벽되고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의 구분이다. 사람의 본성이 본래부터 바른 이치와 평화로운 다스림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거룩한 임금이 필요하며 무엇 때문에 예의가 필요하겠는가?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옛날 성인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편벽되며 도리에 어긋나고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임금을 세워 군림하게 하고, 예의를 밝혀 교화하며 법을 정하여 다스렸으며, 형벌을 무겁게 하여 금함으로써 온 세상으로 하여금 다스림에서 출발하여 선()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임금의 다스림이고 예의의 교화다. 이제 임금의 권위를 없애고 예의의 교화를 없애며 법률의 다스림을 없애고 형벌의 금함을 없애고 가만히 기대서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들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해쳐서 빼앗을 것이고, 무리가 많은 자는 적은 자를 억압하여 온 세상이 패륜으로 어지러워지고, 서로 죽여서 오래지 않아 세상은 망하고 말 것이다. 이로 볼 때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그 착함은 위선임이 분명하다.

 

제시문 (가)는 밀턴의 『실락원』이고, (나)는 당나라 때의 뛰어난 시인·문필가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종수 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이며, (다)는 순자(荀子, 기원전 298?~기원전 238?)의 성악설(性惡說)로 『순자』 「성악편」에 나온다. 먼저, (가)에서는 서구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절대자 야훼는 애초에 인간에게 이성과 자유 의지를 부여했다. 야훼는 그의 아들인 성자에게 ‘이러한 이성과 자유 의지가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결합될 때에만 자신을 제대로 섬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국 참된 자유란 신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이성과 옳음을 행할 수 있는 의지로 신의 뜻을 겸허히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판단과 선택은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몫임을 깨닫기를 바랐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준 것이다. 곧 신은 선악의 판단과 행위의 책임을 인간의 자유의사에 맡겨 놓은 셈이다.

제시문 (나)와 (다)는 동양 고전에서 뽑은 글이다. (나)의 출전(出典)인 「종수 곽탁타전」은 주(周)나라에서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주옥같은 시와 문장을 모아 엮은 『고문 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전하는 유명한 글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곱사병을 앓아 등이 위로 솟고 굽었기 때문에 ‘탁타(낙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편 (나)의 성악설 역시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289?)의 성선설(性善說)과 더불어 유명한 사상이다. 이 두 제시문에서 저자들은 인간의 본성과 교육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유종원은 곽낙타의 입을 빌려,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서 성장과 발전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대로 잘 보존하고 가꾸기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순자의 견해는 유종원과 달랐다. 그는 인간은 본성이 선하지 않고 스스로 바로잡을 힘이 없기 때문에 외적인 힘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본성과 교육에 대한 대조적인 입장을 보여 주는 이 두 가지 주장은 다음과 같이 확대 해석될 수 있다. 본성을 잘 다스리고 연마하면 진선미(眞善美)의 완성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예컨대 불교의 참선(參禪)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나 본성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훌륭한 스승이나 지도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을 지닌다. 수천 년간 유지되고 있는 교육 기관이나 정치 제도 등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다.

 

+길잡이_ 2003학년도 이화 여자 대학교 논술 모의고사 문제를 응용한 것이다. 학생들이 제시문들에 언급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내용을 정리·비교하고, 그것을 인간의 자율성과 타율성이 사회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문제로까지 확장시켜 생각할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 또 학생 개개인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관이 성선설과 성악설 어느 쪽에 가까운지에 대해 토론을 시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20쪽 참조】한편 여호와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타락할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벌을 대신 받을 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자 여호와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나선다. 밀턴은 이를 통하여 인간 세계의 근원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여호와와 예수, 사탄의 무리와 인간을 등장시켜,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밝히려 한 것이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신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다.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든, 그 유혹을 꿋꿋이 견뎌 내든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으므로,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는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아담과 이브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원죄(原罪)를 저지르고 말았고, 그 결과 인간은 신의 세계를 떠나서 이기심과 정욕에 따라 살아가게 되었고, 온갖 죄를 범하게 되었다.

 

마무리하기

1. 다음은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의 일부다. 이 제시문을 읽고, 그 요지를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

 

眞理의 오묘함을 보라. 진리는 특정한 논리나 사고의 방법에 묶여 있을 때보다 자유롭고 자율적일 때 더 빨리 자신을 드러낸다. …(중략)…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쓰고 말하는 特權으로 인해, 激論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기에 적합하다. 토론을 좋아하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神殿이 지금 무의미하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모든 敎義의 온갖 소리가 이 땅에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풀려 있다 할지라도 진리 역시 그들과 함께 그곳에 있다. 그러므로 許可禁止로 진리의 힘을 의심하는 것은 해로운 일이다. 진리와 虛僞가 맞붙어 論하게 하라. 누가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진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진리를 향한 論이 허위를 억제하는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다.

 

제시문의 핵심은 진리와 허위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토론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다. 밀턴은 진리는 자유로우면서도 격렬한 토론을 통해서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때 제시문의 요지를 토론이 아니라 진리 쪽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 언뜻 보기에 이 글은 진리를 강조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그 진리란 것도 열띤 토론과 논쟁, 논박을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길잡이_ 2003학년도 서울 대학교 수시 2학기 모집의 ‘인문 계열 심층 면접 기본 소양 평가’에 나왔던 제시문을 활용한 것이다. 발문에서는 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요지란 곧 글의 핵심이므로 글의 주제를 정확하게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글의 핵심을 재빨리 파악한 다음, 핵심 단어와 문장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된다.

【218쪽 참조】 그러나 조국이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는 소식에 밀턴은 그리스 여행 계획을 취소한 채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청교도 혁명과 공화제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는 보수적인 영국 국교회를 비판하며 성서 중심주의를 주장한 논문, 이혼의 정당성을 외친 논문, 검열 없는 출판의 자유를 주장한 「아레오파지티카」(1644) 외에, 「왕과 위정자의 재임」·「우상 파괴자」(1649), 1651년과 1654년 두 편으로 간행된 「영국 국민을 위해 변호하는 서(書)」처럼 찰스 1세의 처형과 공화제를 지지한 문서들을 남겼다.

 

1. 15세기 말에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의 결과, 서유럽 경제에는 큰 변동이 생겼다. 봉건 영주제가 몰락하자, 소농민, 소생산자 층에서도 독립의 기운이 감돌았다. 여기에 칼뱅파의 교의(敎義)는 구체제(舊體制)에 대한 변혁을 고취시키면서, 프랑스의 경우 서민에서 궁정·귀족에게까지 퍼져 갔다. 기즈 공(公)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파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도 부르봉과 콩데 공 등을 지도자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위그노 전쟁이다. 위그노란 프랑스의 칼뱅파 프로테스탄트의 별명이다. 앙리 2세의 왕비이자 샤를 9세의 섭정(攝政)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왕권을 보전하고 신구(新舊)의 세력 균형을 꾀하기 위하여, 프로테스탄트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 내전을 더욱 격화시켰고, 30년 넘게 계속되던 전쟁은 프로테스탄트 출신 앙리 4세에 의해 수습되었다. 그런가 하면 1572년 에스파냐의 속령(屬領)인 네덜란드의 홀란트, 위트레흐트 등 북부의 일곱 개 주(州)는 본국의 지배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1609년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2. 30년 전쟁_ 독일을 무대로 1618년부터 1648년까지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벌어진 종교 전쟁으로, 최대의 종교 전쟁이라고 평가된다. 독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칼뱅파 신교도들의 반란을 구교도인 독일 황제가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독일 내의 신구 양교도 간의 내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덴마크·스웨덴·프랑스 등 주변 국가들이 각기 독일에서의 세력 확장을 목표로 삼고, 신교도를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차례로 개입하면서 치열한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출처: 독서 평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