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떠났다
버스가 떠났다.
한동안 멍하니 버스 꽁무니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2, 3분 정도, 그래, 내 생애에서 이렇게 2, 3분 정도만이라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방금 보낸 아들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15년이 넘은 그때 보낸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잘 있느냐? 잘 있어라.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2, 3분의 이 시간-
해병대에 입대한 아들이 6주간의 힘든 훈련을 끝내고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 동대구역에서 이동을 한다고 했다. 그를 꼭 빼닮은 멋진 아들이 어느새 장성해서 군대에 간 것이다. 입대하는 날 아침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기껏 아들이 좋아하는 깻잎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는 것이었다. 염려와 당부의 말을 되풀이하면 오히려 잔소리로 들릴 것이고 서로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들은 ‘아무도 따라오지 마라’고 했고 나도 바쁘니까 ‘혼자서 가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여행 보내는 것처럼 웃으면서 ‘잘 갔다 와!’ 하고 내가 먼저 현관문을 닫고 출근을 했다.
출근 시간이 늦어서 택시를 탔는데 그때부터 아들의 모습이 그의 모습으로 포개어져 눈앞이 흐려졌다. 아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못하고 그제서야 훌쩍훌쩍 소리 내어 울었다. 택시 기사는 '요즘 군대 좋아졌심더' 하면서 한마디 거든다. 마음으론 늘 보듬어 안아주고 싶었지만 슬픔을 전염시키지 않기 위하여 늘 강한 어법이나 반어법을 쓰곤 하였다. 행여나 버릇없는 아이가 될까 봐, 환경을 탓하는 연약한 사람이 될까 봐, 칭찬보다는 꾸중을 많이 해 왔다. 남들이 모두 ‘예’라고 할 때 혼자서 ‘아니오’라고 하지 말라며, 개성을 살려주지도 못했다. 항상 더불어 산다는 것을 잊지 말고 대한민국에 사는 남자의 의무를 당연히 한다고 생각하면 힘들 것도 없다고, 특별대우도 해주지 않았다. 더 많은 격려를 해 주지 못한 것이 목에 걸린다.
며칠간은 어디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소포로 배달된 옷과 첫 편지를 받고 그때서야 아들이 군대 간 것을 실감했다. 군대 보낸 아들을 둔 부모는 그때의 마음을 알 것이다. 갑자기 방정맞게, 유품을 받아 든 부모의 마음을 떠올리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도 2년 후에 다시 돌아오니 얼마나 다행이랴.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뜯어 본 상자 안에 늘 입고 다니던 낡은 청바지와 티셔츠, 운동화가 흐릿하게 보였다. 새것으로 넣어 준 속옷은 그대로였고 어쩐 일인지 옷가지와 운동화엔 흙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아직도 장롱 안에 걸려 있는 그이의 옷가지들, 또 그 옷가지들이 겹쳐진다. 상자 여기저기 바삐 날려 쓴 아들의 필체, 초등학교 이후 처음 받아보는 아들의 편지, 사랑하는 어머니께-.
그런데 상자 안에 낯선 주소의 또 다른 한 장의 편지가 있었다. 여친에게 전해 주라고 했다. 목구멍까지 울컥 넘어오던 커다란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스르르 제 자리로 내려앉았다.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살짝 표 안 나게 뜯어보았다. 같은 과 여자 친구한테 쓴 편지였다. 월드컵 축구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그런 내용뿐이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릴 뻔했는데 다행이다. 젊어서 혼자 된 시어머니의 마음이랄까 봐 애써 태연한 척 태도를 바꾼다. 입대 하는데 따라갈 여자 친구도 없냐고 핀잔을 주었는데 편지 쓸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영정 사진을 들어야 했던 아들이 이렇게 컸구나 싶어서 한편으론 마음이 놓인다. 부모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대신에 가슴 설레는 아름다운 그리움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군사우편이라고 찍힌 아들의 첫 편지를 받고 거의 30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보냈던 그 시절의 편지들, 세월이 이렇게 흘러 비 내리는 유월 아침, 석류꽃 떨어지는 모습 보며 아들에게 연서를 쓰듯이 설레는 맘으로 긴 편지를 보냈다. 어느덧 나는 쉰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군사우편이 찍힌 아들의 편지를 받고 있다. 요즘은 정말 군대가 좋아져서 군 입대 하자마자 가족들이 인터넷으로 편지를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면 매일 그것을 출력해서 본인에게 전해 준다고 한다. 답장은 받을 수가 없지만 부대에서 훈련받는 사진도 올려 주고 소식도 전해 준다. 아들을 보듯이 매일 해병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편지도 쓰고 소식도 전해 들었는데 이제 6주 훈련이 끝나서 그것도 끝이 났다.
‘엄마! 내일 아침 여덟 시에서 아홉 시쯤에 동대구역에 도착하지 싶어요.’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불을 켜 보니 한밤중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시간은 취침 시간일 텐데 전화를 어떻게 한 걸까? 밤새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동대구역에 나갔다. 입장권을 사서 포항에서 오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근래 이렇게 두근거리고 설레는 기다림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드디어 군기가 잔뜩 든 군인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모습이 아직 앳되게 보이지만 그들은 분명 씩씩한 대한민국 해병대였다.
주눅이 잔뜩 든 표정으로 아무리 살펴봐도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군인들을 따라서 헐레벌떡 출구 앞으로 뛰어갔다. 거기서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보아도 우리 아들이 없다. 우리 아들은 키가 훤칠하게 크기 때문에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우뚝 솟은 사람은 없다. 다 키가 크다. 뭐가 잘못 되었나? 불안해하면서 버스가 대기해 있는 곳까지 다시 달려갔다. 아! 군인들 앞쪽에 우리 아들이 보였다.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살이 좀 빠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검게 타지도 않았고 말쑥하고 멋진 모습이다. 아들이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늠름하게 내게 신호를 보내왔다.
가슴이 뭉클했다. 기다림의 끝이 내 앞에서 펼쳐질 때 그것은 오히려 꿈처럼 느껴진다. 자랑스럽고 대견한 마음으로 나도 아들에게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우린 서로에게 엄지손가락처럼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마침 버스 창 쪽으로 앉는 아들에게 시계와 편지를 전해 주었다. 혹시나 마중 나왔다고 교관들한테 꾸중 들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말 한마디 못하고 멀리서 한 2, 3분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서로가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잘 하라고, 잘 하고 있다고 마음을 주고받았다. 이렇게라도 내 눈으로 건강한 아들을 보고 나니 마음이 놓인다. 가장 더운 여름 날씨에 힘든 해병대 훈련을 잘 견뎌 낸 아들이 든든하고 자랑스럽다.
후반기 교육을 받고 떠날 때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으리라. 100일 후엔 휴가 나오는 아들을 반갑게 맞을 수 있으리라. 기다림의 끝이 허망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 그 기다림은 살아가는 일상의 희망이 된다. 일상의 희망이 되는 아들, 그와 나를 이렇게도 끈끈하게 엮고 있는 아들, 내가 기다리는 것은 휴가 나오는 아들뿐만 아니라 어쩜 아들 뒤에 있는 그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다리는 그가 오지 않아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을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그를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일상의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아침에 신발 끈을 매고 웃으면서 나선 사람, 아무런 약속도 없이, 작별의 인사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간 사람, 남은 내 생애에 단 2, 3분 만이라도 만나서 이렇게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 잘 가라고, 잘 있으라고 눈빛으로라도 이별의 인사 한번 나누고 싶다. 그냥 엄지손가락 내밀며, 우리 서로 다른 세상에서 잘살고 있다는 걸 한 번만이라도 확인하고 싶다. 아들을 태운 버스가 떠난 자리에서 나는 잠시 장주의 한 마리 나비가 된다. 끝.
(2007. 7. 200자 원고지 20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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