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동짓달 밤에

몽당연필^^ 2013. 12. 6. 23:55

퇴근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시린 하늘에 가녀린 초승달이 떨어질듯 걸려있다.

그렇구나. 긴긴 밤이 시작되는 동짓달 초나흘이구나.

동짓달 한 허리를 베어낼 것도 없이

들어서자마자 피곤이 엄습해오면서

곧 뒤따라 잠이 쏟아진다.

불금이라 일컫는 금요일 밤인데,

이대로 자는 것은 긴긴 동짓달 밤에게 미안해질 수도 있다.

임 오시는 날 아니어도 어느 날 밤 풀어헤칠 수 있도록

동짓달 밤 한 허리를 좀 베어둘까?

 

가장 최근에 아름다운 일이 무엇이었던가?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감동받은 일이 있었던가?

그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나간 것을 기억하지 못하나보다.

제때 기록해 두지 않으면 정말 기억 속에서 멀어진다.

생각도 없고, 감동도 없고, 설렘은 더군다나 없고...

그렇다고 슬프거나 화나는 일도 별로 없다.

겨울보다 더 차갑고 삭막한 감정이 아닐런지...

그러나 이것을 평상심이라 미화시킨다.

 

며칠 전 첫눈이 내렸었지.

첫눈 내린 날의 추억 하나 없지만

삭막해진 내 감정을 녹이기 위하여

다시 그날로 되감기...

퇴근길 버스를 타고 오는데

첫눈이 소복소복도 아니고 펑펑도 아닌

휘몰아치는 바람에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 지역에선 귀한 첫눈인데...

휴대폰을 꺼냈지만 늦은 퇴근시간이고...

 

첫눈 오는 날은 그렇게 아무런 추억하나

일깨우지 못하고 만들지 못하고

가버리나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다짜고짜 메모장을 준비하라고 했다.

비가 눈 되어 내리는 지금의 마음을

받아적으라니...

요즘 세상에 문자도 메일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이름하여 첫눈 내리는 날의 대필 편지

오늘 이것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분류한다.

 

아, 그리고 또 있다.

소설을 쓰시는 연로하신 선생님의 뜻밖의 선물

참 당황스럽고 마음에 안 드는 촌스러운 선물이라고

고마움도 제대로 표시하지 않았는데

오늘 이것을 감동적인 선물이라 이름 짓는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 누군가를 생각하며

분홍빛 사랑마크 발매트를 선물로 고르시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남의 감정을 가늠하지 못하고

내 감정의 잣대로만 바라보는 일상, 그러나

오늘은 이것도 감동적인 일이라고 분류한다.

 

이렇게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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