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텔레비전을 켜면 곳곳마다 선거 토론이 벌어진다.
똑똑하다. 정말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한다.
그런데 문제는 말은 잘 하는데 듣는 사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논술세대이다. 논리적인 글쓰기 훈련을 받아 온 터다.
말이 난무하고 말의 공격성이 거칠어지는 세상이다.
요즘은 학교마다 토론반(굳이 디베이트반이라고 하는지?)이
활성화 되어 더욱 더 말 잘하는 법을 배운다.
어눌한 말보다 예의없는 말을 들을 때 더 불편할 수 있다.
차분한 교실-
눈이 번쩍 뜨였다.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는 책이 책상 귀퉁이에 팽개쳐져 있은 지가 몇 주일이 지났다.
수업 개선이나 교실 개선이라는 책은 뻔한 내용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읽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같이 나이가 많은 교사에겐 못마땅한 제안이 대부분이고 못 따라 갈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책을 넘기다 보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차분한 교실?
항상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교실 만들기에 주력을 하라는 말을 들어온 터고
사실 나도 그런 수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성격까지 바뀐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논술을 십여 년 가르쳐 오기도 했지만
말 많이 하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내 속마음과 꼭 같은 제안을 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
궁금해서 다시 보니 일본의 교육학자 사토마나부란 사람이었다.
공감되는 부분과 반성할 부분이 있어서 옮겨 본다.
-왁자지껄하고 괴성이 터져 나오는 교실, 활발하게 ‘저요, 저요’하며 손은 올라가지만
발언 경쟁만 과열되어 있는 교실, 혹은 숨쉬기조차 힘든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몸이 굳어져 버리는 교실 등은 차분한 교실에 대비되는
반대의 극에 있는 교실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차분한 교실에서는 교사도 아이도 주체성이라는 신화로부터 자유롭다.
차분한 교실에는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구축되어 있으며
으스대며 자기주장을 하지 않아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저절로 소중하게 다루어지며
인정되는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구축되어 있다.
차분함이란 말에 표현되어 있는 촉촉함이란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피부감각의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수동적이란 걸 무조건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수동적 능동성’으로서의
주체성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주체성은 수동성을 결락한 일방적인 능동성에
의거하고 있는 것에 비해 차분한 교실은 사람과 사물에 대한 대응이라는 수동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실제로 건강하고 활발하면서 자신감은 가득하지만 주위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대응력이나 배려가 없는 사람만큼 저속하게 웃기고 귀찮은 사람은 없다.
인사가 좋은 예이다. 기분 좋은 인사는 상대에 대한 대응으로서 말을 했을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지 상대와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말을 건네는 것은
오히려 불쾌감을 가져올 수도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갑작스런 발신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발신 전에 상대에 대한 대응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도 발언하는 것 보다는 듣는 편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들은 아이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발언을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듣기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발표력이 있는 아이보다 가만히 있어도 잘 듣는 아이를
배움에서는 훨씬 우수하게 평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이들의 통지표에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발언 합시다’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사실은 무턱대고 함부로 발언하는 아이에게 ‘더욱 주의 깊게 듣도록 합시다.’ 라고 써야 할 것인데 말이다.
“좀 더 큰 소리로” “좀 더 확실하게” 는 교실에서 교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확실하고 명석하게 발언해야 한다는 신념에 의문이 없는 교사는 아이들의
더듬거리는 발언의 훌륭함을 이해할 수 없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애매모호한 사고나 모순
그리고 갈등을 안고 있는 복잡한 감정의 굉장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천히 사물이나 사항을 생각하는 아이들과 더듬거리는 말로서 자신을 이야기 하면서
생각하는 아이는 ‘발표의욕이 낮은 아이’로 무시당하고 마는 것이다.
모든 창조적인 행위는 더듬거리는 언어에 의해 탐색적으로 수행되는 행위이다.
만약 교실에서 언어적 표현력을 기르고 싶다면 ‘발언’을 장려하기 보다는
‘듣는 힘’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 돌아가는 것 같으나 실은 지름길이 된다.
듣는 힘이 교실에 길러졌을 때 비로소 교실에서의 언어 표현도 풍부해지는 것이다.
밝고 활발한 활동이 좋은 수업이라는 주체성 신화에서 벗어나서 남을 배려하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차분한 교실 만들기에 교사들이 노력해야 할 때이다.-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 사토마나부>에서 일부 발췌
요즘은 어디서건 듣는 사람은 없고 자기주장만 난무하는 세상이다.
어떤 것이 좋은 교실 수업이라 할 수 없지만 이 글에 공감하며 깊이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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