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2011년 10월 15일 오후 05:46 (겉봉에만 쓰는 편지 / 이정록)

몽당연필^^ 2011. 10. 15. 17:47

겉봉에만 쓰는 편지

                            이정록

편지를 멀리한다 싶어 편지봉투를 한 꾸러미 사놨건만,
편지는 쓰지 앉고 부의(賻儀)봉투로 다 써버렸다.
흰종이띠만 남았다.

이곳을 빠져나간 봉투는 아무도 본인답장이 없었구나.
그가 남긴 일가(一家)가 인쇄된 영수통지나 보내왔구나

갈수록 부의란 한자가 반듯하게 써진다.
꼿꼿하게 잘 나온다. 
쓰는 김에 몇 장 더 써놓을까?
흠칫 놀랄 때가 많아졌다.
편지봉투를 묶고 있던 종이띠에,
수갑처럼 양손을 끼워 놓는다.
손가락도 묶지 못하고 툭 끊어진다.
슬픔이나 설렘 없이 편지봉투를 꺼내는,
내 손에서 시취(尸臭)가 났다

편지봉투가 떨어져서 공무용 흰 봉투에 쓴다.
봉투 가장자리에 남빛 지느러미가 인쇄돼 있다.
망자(亡者)는 지금쯤 어느 먼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까,
문득 공용봉투가 수족관처럼 느껴진다.

죽어
부의로나 한 번
돈봉투를 받는구나
그것도 관용봉투로 받는구나.

봉투만 보고도 뜨끔하지나 않을까.
영정 안의 눈초리를 피해 부조함에 떨군다.
부조함 안에서 물방울 소리가 난다.
어망에 든 조기 떼처럼,
부조함 속에서 살 비비고 있을 흰 봉투들,
화장(火葬)을 마치고 물속에 들면 비늘 좋은 조기나 될거나.
새벽 세 시,
상주 먼저 지느러미를 접고 바닥에 눕는다.

지하 영안실이 물 빠진 수족관 같다
화투패처럼 가라앉는 남은 자의 비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