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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신춘문예 당선작품

몽당연필^^ 2016. 1. 1. 11:01

ㆍ2016 경향신문 시 부문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 /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당선소감]의자는 시를 낳는 성소…궁합 잘 맞는 난 행운아

 

이 세상에는 의자가 참 많다.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지하철에도 의자는 넘쳐난다. 아니다. 의자보다는 엉덩이가 훨씬 더 많다. 내게도 늘 의자를 그리워하는 엉덩이가 있다. 가끔 시를 쓰는 대신 차라리 나무를 심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결국 나는 그 나무로 또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이제 의자와 나무가 같은 혈족이라는 걸 안다.

오늘은 잠시 의자와 떨어져 있었고 황송하게도 누워서 당선소식을 받았다. 몽중일까. 눈을 뜨고 있어도 꾸는 꿈처럼 더듬더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본다. 여전히 내 머리맡을 지키는 의자, 이 기회에 의자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의자여! 정말 미안하다, 아니 참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더 미안하겠다.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의자를 믿고 까분다

나는 행운아다. 의자와 궁합이 잘 맞는 엉덩이를 갖고 있으니. 시를 빌미로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즐겁다. 언젠가 삐거덕거리던 시들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주는 날들이 올까. 대화는 계속될 것이고 의자는 나의 모든 시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성소다. 어떤 자세로 의자에 앉아야 할까 늘 함께 고민하는 ‘구밀’과 ‘13시’ 나의 시동지들과 행운을 나눈다. 의자에 항상 따뜻한 방석을 놓아주는 나의 가족 연, 동 그리고 남편 너무 고맙다. 심사를 해주신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그리고 손택수, 김행숙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경향신문사에도 깊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광은, 의자에게 바친다.


변희수(본명 변정숙)<br />1963년 경남 밀양 출생. 대구 거주 | 영남대 국문과 졸업

변희수(본명 변정숙) 1963년 경남 밀양 출생. 대구 거주 / 영남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아,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 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만.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과 ‘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

시인 이시영·황인숙 심사위원(왼쪽부터)이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하고 있다.<br />서성일 기자 

 

시인 이시영·황인숙 심사위원(왼쪽부터)이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시인 이시영·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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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2016 매일신문 수필 부문 당선작

 

 

비를 기다리는 마음  / 손 훈 영

 

두툼한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한다. 하늘의 허파가 용트림을 하며 짧고 강한 바람을 쏟아낸다. 번갈아 쉬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당장이라도 엄청난 비를 퍼부어 댈 것 같다. 비의 숨 냄새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비가 오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솟아난다. 드물게 몸과 마음이 활력으로 탱탱해진다. 오늘은 비의 예감만으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달릴 채비를 한다. 막힘없이 달려 보기에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가까운 인터체인지로 차를 올린다. 목적지는 없다. 비를 맞으며 실컷 달리다 그만 달리고 싶을 때 돌아오면 된다.

‘비 탄다’는 말이 있다. 맑은 날과 비교해 비 오는 날의 심리상태가 유난히 다른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는 ‘습기에 특별히 민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흘려 넘겨 버리는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쉽게 상처를 입는다. 꿈속에서도 줄곧 비가 내리고 찬란한 햇빛 아래서는 현기증을 느낀다.

빗줄기가 사다리처럼 하늘까지 이어진 날, 그런 날은 모든 것에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쨍한 햇살 아래서 악착같아지던 마음과는 대조적이다. 닿을 듯 가까워진 하늘이 강퍅하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팍팍한 마음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일 때가 더 평화와 가깝지 않겠나.

자동차는 거침없이 달린다. 드디어 전면 창으로 빗방울이 투덕거린다. 아스팔트가 거뭇하니 젖어온다. 내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 안의 빗방울들은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에 이끌린다. 오랜 그리움 뒤 연인과의 해후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고 가슴 전체가 따뜻해져 온다.

대기를 장악한 빗방울들의 드라마가 풍성하다. 와∼와 쏠리듯 다가와 파열하듯 장렬하게 부서져 내린다. 녹음을 머금은 진초록 유리창 위로 방울방울 사념들이 매달린다. 온몸을 에워싸는 빗방울이 혈관에 주입되는 링거액처럼 메마른 정신을 빠르게 타고 돈다.

맑은 날보다는 어둑시그레 비 오는 날이 더 좋은 것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정서 가운데 하나이다. 두 날의 심리적 대비가 너무 도드라져, 한때는 런던이나 파리나 뮌헨 같은 곳에서 살고 싶기도 하였다. 늘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자주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럽의 그 도시들을 동경해 보기도 하였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가로수의 춤은 더 격렬해진다. 서서히 타이어에 들러붙는 아스팔트의 질감도 달라진다. 차체와 도로가 한 덩어리로 밀착되며 어느덧 속도감마저 사라진다. 점차 우주적 진공 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질구레한 잡념들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마침내 나는 느낌표 하나로 존재한다.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영화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만큼 비 또한 그렇다. 훌륭한 영화가 마음을 한껏 드높여 주듯 비도 정신과 영혼을 한 단계 상승시켜 준다.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 그 이전과 달라진 자신을 느끼지 않는가. 그때의 고양된 느낌은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 존재를 정화시켜 준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빗줄기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면, 와이퍼가 지나간 유리창처럼 말간 마음이 된다. 유난히 ‘비를 탄다’는 것은 남다르게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정화에의 요구가 유달리 강하기에 마음을 씻어 낼 수 있는 비 오는 날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마음의 정화 욕구가 남다르다. 그것은 그만큼 상처받기 쉬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존재하느라 으깨어진 상처의 파편들이 누구보다도 많기에, 그것들을 걸러 내는 작용이 더 자주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홀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환해져 온다. 동그란 핸들에 목숨을 얹고 어둑한 하늘을 향해 질주하노라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순하게 정리되면서 많은 것들로부터 초탈한 심정이 된다.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약하고 가뭇없는 존재들인지 뼛속 깊이 느껴지기도 한다. 풀과 같이 약한 생명이기에 지금, 살아서, 힘차게 내 심장에 대해 그만 숙연해지고 만다.

거대한 덤프트럭이 물세례를 퍼부으며 바짝 다가와 비켜 지나간다. 움찔하며 핸들을 다잡는다. 그렇다. 비 오는 날의 고속도로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확실한 긍정을 확인시켜 주는 공간이다. 시속 백 킬로미터의 속도감으로 펼쳐지는 비에 젖은 도로는 보다 더 본질적으로 살아갈 힘을 재생시켜 준다. 생명만이 진실이기에 누추한 욕심들이 떨어져 나가고, 검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향해 애틋한 마음이 된다. 비를 뚫고 도로를 가로질러 천천히 날아가는 흰 새를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하늘에 닿는 문장을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것처럼 비를 기다린다. 햇빛 화창한 날에도 무슨 부적처럼 우산을 챙겨 들고 간절히 비를 기다린다. 비는 보이지 않는 실존적 물음에 마음껏 탐닉할 수 있게 해 준다. 삶이 무엇인지, 답 없는 답을 찾기 위해 영화관을 찾고 도서관을 드나들며 온몸에 비의 지문을 찍으며 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예리한 비의 지문은 머릿속에 부식된 붉은 녹들을 벗겨 내고, 가슴속의 두터운 지방질을 뚫어 초록빛 생명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나날의 상처와 황폐함에도 이어질 것이다. 폭력과 무관심이 도처에 횡행해도 불친절한 우리네 하루는 안이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 위로 오늘도 비가 내린다.

 

 

◆당선 소감…어두웠던 무의식 구석구석 쓰다듬은 시간

서설이다. 질척이던 진눈깨비가 포근한 눈송이로 바뀌는 찰나, 순백의 허공을 뚫고 신의 특별한 전언이 날아든다. 한 장의 호외가 내 앞에서 꿈결같이 나부낀다. 재능에 대한 의심으로 황량하던 나에게 호외가 뿌려주는 황홀함은 아스피린과도 같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그동안 생활인으로서 실격에 가까웠던 내 아웃사이더적 행각이 당선이라는 소식 앞에서 이해되고 정당화된다.

아무도 나에게 프로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프로적으로 쓰고자 했다. 쓸 수 있을 때도 쓰고 쓸 수 없을 때도 썼다. 쓸 수 있을 때는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썼고 쓸 수 없을 때는 왜 쓸 수 없는지, 그 답답한 마음에 대해 썼다.

글 심(心)을 돋우기 위한 가장 좋은 자가발전 조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이었다. 글 쓸 힘이 나지 않고 마음이 바싹 말라있을 때, 그보다 더 좋은 비책은 없었다. 그러므로 쓰고 또 써야 했다.

자판에 글자를 찍을 수 있는 이상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에게 쓴다는 행위는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냥 그대로 흘러 가 버리게 두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실천이었다. 흐르는 시간에의 저항은 그 시간을 응시하는 것이었고 그 응시는 기록이라는 실천으로 남았다. 응시와 기록은 적어도 더 이상 후회라는 괴물이 나를 조롱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게 해 주었다. 더 이상 후회할 시간이 없었기에 응시와 기록은 내내 현재진행형이었다.

한 편 두 편 글을 써서 내보일 때면 찢어진 천막처럼 펄럭이던 마음이 고요해졌다. 세상을 향해 굳게 닫은 문을 조금 열고 깨끗이 빤 빨래 하나 내 거는 심정이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어둡고 음습하던 무의식의 오지를 구석구석 훑고 쓰다듬어 나가는 시간이었다. 불안을 종식시키는 자가 치유의 시간이며 시커멓게 죽어가는 의식을 도려내는 정신분석의 시간이었다. 누구와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할 수 있었다. 혼자라면 자신 있었다.

글 판 깊숙이 발을 담그기가 두려웠던, 그저 그 언저리를 맴도는 주변인일 뿐이었던 나를 ‘발견’해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하다. 기쁨도 슬픔도 없이 매일 조금씩 글을 씀으로써 그 고마움을 갚겠다. 수필사랑 문우들과 두 분 선생님, 오래 같이 가고 싶다.

 

◆심사평…읽고 나면 삼빡한 뒷맛…탄탄한 문장 돋보여

문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신춘문예에 도전해 본다. 더러는 재수`삼수`사수를 마다하지 않는다. 열정 때문이다. 신춘문예를 통해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문학에 대한 꿈을 실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매일신문의 신춘문예는 ‘작가의 꿈’을 실현하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을 뿐 아니라 그 역사와 전통 또한 오래되었다.

문학은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다. 마땅히 낱말을 부리고 문장을 다듬는 기술을 터득함으로써 개성 있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문단의 구성과 내용의 효과적 전개, 주제의 설정과 형상화, 그리고 사람살이의 지혜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 거기다 신인다운 참신성을 겸비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응모작품 가운데 태반이 신변잡기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하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고, 주체 밖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현상에 관해 서술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작가 개인의 자잘한 신변사를 글감으로 삼기 마련인데, 자칫하면 무늬 없는 평범한 작품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수필은 산문으로 쓰인다. 그러나 같은 산문이라도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운문적 성격이 강하다. 이를테면 치밀한 묘사나 장황한 서사적 언어보다는 간결하고 여운이 있는 문장이 돋보인다.

심사 대상 작품은 총 436편이었다. 먼저 수필로서의 기본에 미달하는 작품을 걸러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20여 편을 가려 뽑았고, 다시 읽고 추린 결과 5편의 작품이 끝까지 남았다. 김승연의 '꿀꿀이바구미애벌레', 김정선의 '매화육궁, 피어나고', 김학철의 '달챙이 숟가락', 박창경의 '죽음의 무늬', 그리고 손훈영의 '비를 기다리는 마음'을 놓고 토론하였다. 고심 끝에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완성도나 문학성이라는 면에서 다른 작품들보다 돋보인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여러 작품 가운데서 한 편을 가려 뽑는 작업은 힘들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당선작은 낱말의 부림이나 문장의 구성이 탄탄하다. 부족할 것도 넘칠 것도 없이 필요한 만큼의 언어가 사용되었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수필을 머리로 읽는 글과 가슴으로 읽는 글로 나눈다면, 당선작은 가슴으로 읽는 글에 해당한다. 그만큼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읽고 나면 뒷맛이 삼빡하다. 당선,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만하지 말고 정진하여 꽃을 활짝 피우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종욱(수필가), 허창옥(수필가)

손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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