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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 / 윤동주 서거 71주기 (2016.2.16)

몽당연필^^ 2016. 2. 20. 23:49



2월 16일이 윤동주 시인(1917.12.30~1945. 2.16) 서거 71주기였다.

마침 어제 영화동주를 보고 왔다.

나의 첫사랑이었고 짝사랑이었던 '윤동주' 그를 보러 갔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 코가 맹맹하더니 감기가 오고야 말았다.

목이 칼칼하고 눈물과 콧물이 날랑 말랑하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제발 이대로 넘어가야 할텐데... 더해질까 걱정이다.

종일 대추생강차 마시고 12시간 이상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몸도 마음도 머리도 텅텅 비워놓고 그야말로 무념무상으로 보냈다.

아무 생각 하지 않고 보내는 데는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그램이

최고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보상자라고 했구나. 이걸 이제사 깨닫다니...

 

여고시절 책상 앞에는 배우 사진 대신에 윤동주 시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시처럼 모습도 순수하고 착하게 보이던 영혼이 맑은 윤동주,

대부분 학생들이 그를 좋아했고서시는 다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

윤동주의이라는 시를 좋아했고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시다.

이렇게 마음이 맑은 사람이 있을까?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동네 근방에 윤동주를 닮은 한 학년 선배인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 남학생을 윤동주 시인인양 생각하며 멀리서 가슴 설레며 바라보기도 했었다.

이후 그의 시를 수업할 때면 정말로 짝사랑 했던 시인인 것처럼 애틋하기도 했다.

시대와 시인을 분리할 수가 없지만 그 때에는 시대적 상황을

깊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문학적 감수성으로만 보았던 것 같다.

 

그 당시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그의 시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나는 스무 살에 무엇을 했는가?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고뇌하고 행동했던 젊은이들을 보며 부끄럽기도 하다.

영화 전편에 시인의 시가 몇 편 나오는데 그 시가 바로 시인의 삶이었다. 

영화란 허구와 재미가 더해지고 특정 배우가 설정되기 때문에

사실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상상력을 제한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 관람하는 내내 조금 조마조마 하기도 했다.

이준익 감독은 저예산이라 흑백영화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의도하고 만들었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의 효과와 향수가 묻어왔다.

영화가 흑백이고 첫 부분에 약간 어색한 함경도 사투리가 많이 나와서

소통이 잘 되지 않고 감정이입도 잘 되지 않는 것 같았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표준어 비슷하게 바뀌어서 오히려 전달이 잘 되었다.

  

일제 강점기고 인물 영화여서 객관적인 관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을 너무 매도하는 관점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잠깐 이광수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윤동주가 해주었다.

무슨 무슨 주의라고 이름 붙여서 나누거나 폄하 하는 것 결국 이기적인 것이다.

고종사촌 간이면서 친구였던 윤동주와 송몽규, 성격은 달랐고 행동은 달랐지만

그들은 문학을 사랑했으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항일하는 마음은 같았다.

어쩜 시대에 희생된 그들, 빛나는 스무살 청춘을 감옥에서 끝내야 했던 그들

양심적인 삶을 살면서도 행동으로 맞서지 못하는 자신을 늘 부끄럽다고 반성한 '동주'

그의 시를 읽으며 아무 걱정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다.

 




윤동주 /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돌아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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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길을 찾는 까닭입니다.